<주전장>(主戰場, Shusenjo)
일본군‘위안부’는, 일본이 만주사변(1931)을 일으킨 이후부터 패전한 1945년까지.
‘위안소’에 강제 동원되어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지칭한다.
보편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고, 언어의 생산과 사용은 정치적이므로
해당 문제를 논함에 있어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지는 특히 중요하다.
현 국제사회에서는 성노예(military sex slavery), 군대성노예제도(military sexual slavery).
국내에서는 주로 일본군‘위안부’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위안부'라는 용어가
문제의 본질을 드러 내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당대의 특수한 분위기를 전달해 주고,
생존자들이 자신을 ‘성노예’로 부르는 데에 정신적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사용했던 단어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작은따옴표를 붙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당 리뷰는 일본군‘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주전장>은 기본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조명한다. 감독 ‘미키 데자키’는 일본계 미국인으로, 2013년 ‘일본의 인종차별’이라는 영상을 올린 후 일본 극우 민족주의자들에게 공격받는다. 이를 계기로 감독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3년간의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영화를 만들었다. 이전의 다큐멘터리들이 주로 피해자의 진술과 경험에 초점을 맞춘다면, 해당 작품은 그를 둘러싼 배경과 논쟁을 제 3자의 시선에서 그려낸다. 감독은 일본 극우파의 주장을 정면으로 드러내고, 이에 대한 반론을 섬세하게 제시한 뒤 관객에게 질문한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하냐고. 일본군‘위안부’ 이슈를 선정적으로 소비하지 않으면서 한국과 일본 국민들의 주요한 주장을 철저하게 담아낸 <주전장>은, 리드미컬한 속도감으로 관객들을 전선으로 내몬다.
“그들은 성노예가 아니라 매춘부입니다”
“일본사람 대부분은 이런 건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그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해요”
“끔찍한 인권 유린을 당한 피해자에게 무엇을 바라는 겁니까?”
“그와 같은 거대한 강간 제도를 만든 건 일본 정부였다는 거죠”
피해자들을 부정하고, 깎아내리고, 지우려 하는 이들은 “그들의 증언에는 일관성이 없지 않습니까?”라고 되묻는다. 이는 법정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며, 피해자의 직접적인 증언은 신빙성이 없고 공식 정부 문서로 된 구체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넘어 역사적으로 만연했던,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풍조이자 구조다. 폭력의 생존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 전에 이를 믿지 못하는, 믿지 않는 ‘듣는 이’를 위해 자기 경험을 가감해야 한다. 폭력 그 자체가 끔찍한 고통인데, 폭력을 언어화하는 건 더욱 가혹하다. 이후에는 2차 가해가 뒤따른다.
일본 우익들은 일부가 돈을 받은 사실을 강조하며 피해자들은 성노예가 아니었고, 그 과정에서 총칼을 동원한 강제징집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돈을 받았다 해도 결국 자유로울 수 없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성노예였다. 자유를 빼앗긴 채 지속해서 강간당했다. 그 속에서 허용되는 아주 작은 일탈마저 없었다면 당시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차마 생(生)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 총과 칼을 이용해 집에서 여성들을 강제로 끌어낸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여성들을 속여서 데려간 것 또한 강제성을 전제한다. <주전장>은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이슈들을 국제법상으로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해 차근차근 안내한다. 개인의 프레임이 아니라, 법적인 정의를 사용함으로써 모두가 공감하는 정의를 확립하고자 함이다.
또한 우익들은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국가가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여성들을 전쟁에 동원하고, 관리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일본군‘위안부’는 전쟁의 우발적인 부산물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전쟁의 핵심 제도였다. 국가에 의해 자행된, ‘거대한 강간 제도’였다. 여성에 대한 군대의 조직적 성적 수탈은 전의, 고양, 참전에 대한 보상 행위로 기능해 일본의 군국주의를 뒷받침했다.
동시에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계속 사과했다’는 주장에 대해, 영화는 차근차근 반론을 제시한다. 1990년대 초반,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을 발표했지만, 이후 아베 정권과 일본 우익,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이를 부정하며 교과서에 실린 일본군'위안부' 관련 내용을 없앤다. 또한 A급 전범들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아베 총리의 모습이 2013년 포착된다. 야스쿠니 신사의 정신은 일본 제국의 올바름과 위대함, 전쟁은 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함이라는 '탈아론(脫亞論)'적 시각을 견지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본의 사과는 과연 유효한가. 이들은 그 흔적을 지우고 있다.
영화는 일본 정치의 중심과 그 연결고리까지 속속들이 파고든다. ‘일본회의’와 이를 지원하는 정치인들의 모임인 '일본회의 의원연맹',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 현 일본에서 주류로 활동하고 있는 우익들의 접점을 살핀다. 제국주의 일본을 진짜 일본이라고 믿는, 우익들의 굳은 믿음은 잘못의 인정을 부인한다. 이들의 목표는 다분히 정치적이고, 동시에 무섭다. 전쟁 이전의 일본 메이지 유신으로의 회귀다.
미국 또한 이 문제에서 빠질 수 없다. 미국은 냉전 대응을 위해 일본 전범들을 다시 정치 무대로 끌어들였다. A급 전범 혐의자로 수감 중이던 기시 노부스케를 석방해 총리로 만들었고, 그의 외손자가 현재 아베 총리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현 일본의 탄생 기원이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역시 미국의 한일관계 개선 압박에 따른 결과다.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배경도 이와 유사하다.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인권침해는 자연스레 주변화되고, 외면당했다.
일본군‘위안부’는 단지 두 나라 사이의 외교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전장>은 국제적인 여성 인권의 측면에서 ‘전시(戰時) 여성 폭력’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시사한다.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존중하는 것은 모든 인권 이슈의 기본 시각이다. 국내에서는 92년, 고(故) 김복동 할머니가 처음으로 피해 사실을 알리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국제적으로 공론화시켰다. 국가의 오래된 터부시로, 담론 속에서 피해자의, 주체의 경험과 목소리는 배제되어왔다. 세상과 단절된 채 침묵해야 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맞이할 시간이다. 그리고 모든 출발은 '그들이 말하게 하는 것'과 '존중'에서 시작한다. 역사의 진보는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인권이 부여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인권은 역사 속에서 경합하며 움직이는 가치다. 피해자, 약자의 고통이 논의되는 것은 지난한 싸움의 산물이다. <주전장>은 당신을 이 치열한 전장 속으로 초대한다. 싸움터에 뛰어들 준비가 되었는가.
<주전장>은 양쪽의 입장과 그 맥락을 전함으로써, 우리가 왜 지금 ‘위안부’ 문제에 관해 이 지점에 와있는가를 이야기한다.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설득하는 인물들에게 둘러싸인 감독은 객관적이고 균형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다. 러닝 타임 2시간 동안 이어지는 싸움은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영화는 보는 내내 머릿속을 헤집는다. 그야말로 끊임없는 전쟁이다. 양측의 논리를 차근차근 제시하다가, 마지막에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군 '위안부'를 기억하는 것은 그들을 추모하는 것이며
그것은 언젠가 그분들의 정의가 구현되는 '희망'을 뜻한다.
또한 인종차별, 성차별, 파시즘과 맞서 싸우는 것을 뜻한다.
미키 데자키 감독은 인터뷰에서 영화를 통해 관객들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배우고, 이를 둘러싼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서도 해답을 얻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며 생각하고, 토론하길 바란다고. 각 나라의 언론이 위안부 문제를 얼마나 편협하게 다루고 있었는지, 양국의 적대감을 어떻게 양산했는지, 또한 영화를 통해 서로에 대한 증오심에서 벗어나 위안부나 다른 역사 문제에 대해 보다 생산적인 대화를 할 수 있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감독의 의도는 성공적이다. <주전장>을 본 이들이라면, 이 싸움에 응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리겠다.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영화를 본 모든 이들이 이곳, 주 전장(戰場)에서 보다 치열하게, 첨예하게 사유하길 바란다.
예술영화관 아트나인, 엣나인필름의 서포터즈 아트나이너 10기로 활동하며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