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후르츠> (Life Is Fruity)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
차근차근, 천천히
빽빽하게 들어선 회색조의 건물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 모노톤의 단조로운 공간 속에서 복잡한 시간의 법칙을 쫓으며, 우리는 오늘도 ‘현대인’의 하루를 보낸다. 높이 솟은 건물들 사이로 횡횡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차고, 길가에 떨어진 몇 안 되는 낙엽은 빗자루 질에 스러진다. 차가운 아스팔트가 땅을 삼키고, 땅 위에서 응당 자라나야 할 열매는 마트의 신선 코너에서만 목격할 수 있는 희귀종이 되었다. 도시에서 자연은 액자 속 그림 같은 존재다. 살아 숨쉬기보다는 하나의 ‘조경물’에 가깝다. <인생 후르츠>는 우리가 흔히 목격하는 삶과는 정반대의 생生을 담아낸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지고, 낙엽이 스며들어 비옥해진 땅이 열매를 품어내는. 거대한 생명의 비밀을 담고 있는 ‘돌고 돎’ 가운데, 90세의 ‘츠바타 슈이치’와 87세의 ‘츠바타 히데코’가 머무르고 있다. 슈이치가 직접 지은 집에서 이들 부부는 자연과 반세기를 동존했다. 뭐든 차근차근, 천천히, 함께 해나가며.
젊은 시절 슈이치는 전쟁으로 불 탄 210만 채의 주택을, 1959년 태풍으로 사라진 집들을 목격하고 ‘인간은 어디에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마음에 품는다. 이러한 고민을 담아 건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슈이치는 일본 주택공단에서 ‘고조지 뉴타운’ 사업(1960년대 일본 정부의 주택 재건 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슈이치는 자연과 어우러진 집과 마을을 설계했지만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명목 하에 반대에 부딪친다. 산은 깎여나가고, 계곡은 묻혀버렸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개발로 황폐해진 고조지의 땅 300평을 사들인다. 15평의 자그마한 단층 통나무집을 짓고, 민둥산에 직접 나무를 심어, 숲으로 가꾼다. 자신이 가진 땅에 자그마한 녹색 숲을 만들고,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모여 마을이 숲이 되면, 커다란 숲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들 거라고.
슈이치와 히데코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신념을 묵묵히 지켜나간다. 텃밭에서 50가지 과일과 70가지 채소를 가꾸고, 자연의 선물로 끼니를 때운다. 필요한 대부분을 스스로 길러내고 소비한다. 푸른빛으로 가득 찬 텃밭에는 직접 만든 팻말들이 곳곳이 꽂혀있다. 단순한 팻말이 아니라, ‘작약, 미인이려나?’, ‘여름 밀감, 마멀레이드가 될 거야’, ‘작은 새들의 옹달샘, 와서 마셔요!’ 등. 아기자기하고 소박하지만 배려가 듬뿍 담긴 팻말들은 부부의 삶과 그 태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자연의 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삶, 그리고 기쁨. 노부부는 이 모든 걸 이웃들과 나눈다. 매일 10여 통의 편지를 쓰고, 마을 사람들, 배달부, 생선가게 점원에게 손그림을 그려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돈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며 병원 설계를 선뜻 무료로 해주기도 한다.
이런 삶이 가능한 이유는 삶의 동반자인 서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슈이치에게는 히데코가. 히데코에게는 슈이치가. 65년간 부부는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함께 살아왔다. 히데코는 늘 슈이치를 먼저 생각한다. 슈이치를 보면서 ‘잘 생겼네.’라고 말하거나,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먹이며 미소 짓는 히데코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속에서 몽글몽글한 따뜻함이 일렁인다. 슈이치는 그런 히데코를 “내게 최고의 여자친구”라 말하며, 늘 히데코를 지지해준다. 엄격한 집에서 자란 히데코가 슈이치에게 무언가를 해도 될까 물어보면, 슈이치는 언제든 ‘그건 좋은 일이니 하세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덕에 점점 스스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히데코와 그 옆의 슈이치를 보고 있으면, 수십 년간의 동행이 얼마나 단단하고 깊은지, 동시에 얼마나 애정 어린지 느껴진다. 슈이치는 촬영 중이던 2015년 6월, 제초작업 후 낮잠에 든 채로 자연으로 돌아갔다. 마치 바람이 스쳐 지나가듯, 낙엽이 떨어지듯. 여태 살아온 삶처럼 죽음을 맞이한다. 슈이치를 보낸 히데코는 ‘지금부터 열심히 살 테니 걱정 마요’라고 약속한다. 남편과 함께했던 어제처럼,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슈이치의 영정에 애정과 정성을 담아 상식을 올리고, 텃밭을 가꾼다. 차근차근, 천천히. 늘 그래 왔듯이.
‘후지하라 겐지’ 감독은 슈이치와 히데코를 만나자마자 '바로 이 사람들이다'라고 확신하며, 네 번의 손편지를 전한 끝에 촬영을 시작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카메라만 보이면 자리를 피하고, 할머니는 촬영 도중 불을 꺼버리는 등 촬영이 순조롭지는 않았다고 한다. 감독은 결국 집안 곳곳에 카메라를 설치해 부부의 자연스럽고 담백한 일상을 2년간 포착했다. 이에 작년에 별세한 일본의 국민 배우 ‘기키 기린’이 내레이션을 맡았고, 그의 목소리는 슈이치와 히데코의 삶을 더욱 깊게 담아낸다. 히데코는 슈이치를 떠나보낸 4년 뒤, 남편 곁으로 갔다. 아마 지금 두 사람은 또 다른 어딘가에서 함께하고 있지 않을까. 또다시 차근차근, 천천히 살아가며.
화려하고 시끌벅적하지는 않지만, 잔잔한 노부부의 일상에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 상상해보지 않은 ‘노년의 삶’, ‘나이 듦’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그로써 인생을 성찰하게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꿈을 가지고 있을지, 그 옆에 누가 있을지. 여태 궁금해하지 않았던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오래 갈수록 인생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한 번도 믿어본 적 없는 말이었는데, 이제는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예술영화관 아트나인, 엣나인필름의 서포터즈 아트나이너 10기로 활동하며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