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빈곤의 굴레
마닐라의 빌딩 숲은 언제나 눈부시다. 번쩍이는 고층 건물과 북적이는 쇼핑몰, 활기 넘치는 레스토랑이 즐비한 이곳은 분명 '아시아의 진주'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다. 하지만 그 화려함 뒤편에는 또 다른 필리핀이 숨어있다. 바로 빈부격차의 심화, 끝없는 인플레이션, 그리고 오래된 역사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로 인해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필리핀 서민들의 고단한 삶이다. 이곳 마닐라에서 살면서 느끼는 절박함은 단순한 개인의 어려움을 넘어, 국가 전체가 짊어진 무거운 숙제처럼 다가온다.
필리핀 경제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불편한 진실은 바로 '빈부격차'다. 마치 거대한 피라미드처럼, 소수의 명문 가문들이 필리핀 전체 부의 대부분을 움켜쥐고 있다. 이들은 정치와 경제의 모든 영역에 거미줄처럼 얽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대다수 국민의 삶과는 완벽하게 동떨어진 부와 풍요를 누린다. 반면, 필리핀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서민들은 오늘 벌어 오늘 먹고 살기조차 버거운 현실에 내던져져 있다.
이런 불평등은 서민들의 밥상에까지 처절하게 드러난다. 필리핀에는 '파그파그(Pagpag)'라는 가슴 아픈 단어가 있다. 이는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건져낸 음식물 찌꺼기를 물로 씻어내고, 강한 양념을 더해 다시 튀겨 먹는 음식을 뜻한다. 마닐라의 빈민가에서 어린아이들이 파그파그로 끼니를 해결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가 아닌, 이곳 서민들의 슬픈 현실이다.
요즘 필리핀도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식료품값은 물론, 매일 써야 하는 연료비까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주머니 사정은 그대로인데 물가만 오르니, 서민들은 그야말로 숨통이 조여드는 기분이다.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운 일이 되어버렸다.
더욱이 필리핀 경제의 특이한 구조가 물가 상승을 더욱 부채질한다. 필리핀은 관광업 의존도가 매우 높고, 해외에 나가 일하는 노동자들(OFW)의 송금에 크게 의존하는 경제다. 이들이 본국으로 보내는 달러는 필리핀 통화인 페소의 가치를 강하게 만든다. 이는 수입품을 싸게 살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필리핀 내에서 생산되는 물품들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전반적인 물가 상승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제조업 기반이 약하고 소수의 부유층 소비에만 초점이 맞춰진 산업 구조도 문제다. 이는 경제 성장의 혜택이 소수에게만 집중되고, 대다수 서민들의 삶을 위한 생산적인 투자와 일자리 창출이 더디게 이루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필리핀이 겪는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분명하고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필리핀은 국가 발전을 이끌 강한 리더십이 부재한 상황이다. 최근 마르코스 가문과 두테르테 가문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정국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다. 이러한 정치적 다툼은 국가적 단결을 해치고, 정작 시급한 경제나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기 어렵게 만든다. 게다가 정부가 소수의 기득권 가문들에게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점도 개혁의 발목을 잡는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필리핀의 이러한 문제들은 뿌리 깊은 역사에서 시작된다. 특히 과거 스페인, 일본, 미국의 식민 지배는 현재의 불평등과 토지 문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백 년에 걸친 식민 통치는 필리핀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스페인 통치 시기 도입된 엔코미엔다(Encomienda) 제도와 레갈리안 독트린(Regalian doctrine)은 토지 소유 개념 자체를 바꿔버렸다. 오랫동안 공동으로 땅을 소유하던 토착민들은 자신들의 땅을 잃고, 스페인 왕실, 가톨릭 수도회, 그리고 식민 당국과 결탁한 현지 유력자들의 손에 광대한 토지가 넘어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다. 결국 대다수 필리핀 농민들은 소작농(tenant farmers)이나 농장 노동자로 전락했고, 아시엔다(Hacienda)라는 거대 농장 시스템 속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야 했다. 수확물의 대부분을 지주에게 바치고 강제 노역과 과도한 세금에 시달리는 것이 이들의 일상이었다.
이 불평등한 토지 구조는 미국 식민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미국은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장려하며 수출 작물 생산을 늘렸지만, 이는 소작농의 삶을 개선하기보다 오히려 미국 자본과 필리핀 엘리트 지주들의 배만 불리고 농민들의 착취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 점령기 동안의 경제적 파괴와 자원 수탈은 기존의 농업 시스템을 뒤흔들고 극심한 식량 부족을 야기하며 서민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이렇듯 오랜 식민 지배를 겪으며 거대 농장(플랜테이션)이 확장되었고, 대다수 국민이 자신의 땅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것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토지 분배의 불균형과 뿌리 깊은 빈부격차의 시작점이 되었다.
또한,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지리적 특성도 정부의 영향력이 국가 전체에 고르게 미치지 못하는 원인이다. 중앙 정부의 통제가 미약한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반정부 세력이 강하게 활동하며 치안 불안을 야기하고 경제 발전을 방해한다. 실제로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일부 지역에서는 아직도 정부군과 반군 세력 간의 충돌이 심심찮게 발생하기도 한다.
필리핀은 분명 아름다운 자연과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나라다. 하지만 그 빛나는 모습 뒤에는 뿌리 깊은 문제들로 인해 고통받는 서민들의 고단한 삶이 존재한다.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며, 진정으로 국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필리핀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