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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시계는 왜 거꾸로 갈까?
게으름의 미학

어차피 인생은 고양이처럼: 마닐라에서 찾은 무념무상

by JOYCOCO

내게 마닐라에서의 삶은 강제로 '느리게 사는 법'을 배우는 학교와 같다. 처음에는 답답하고, 속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이제는 이 느림이 주는 뜻밖의 평화를 만끽하고 있다. 마치 나 자신이 마닐라의 길거리 고양이들과 동화되어 가는 듯하다.


마닐라 고양이의 게으른 철학

마닐라의 햇살은 늘 후끈하다. 이 뜨거운 기운 아래, 길을 걷다 보면 자주 길거리 고양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녀석들은 정말이지, '세상만사 귀찮음'의 정수를 보여준다. 늘어진 몸뚱이를 아스팔트 위에 찰싹 붙이고 자는 모습은 가히 예술이다. 어떤 때는 자는 건지 죽은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한국에서 보던 길고양이들과는 너무나 다르다. 한국 고양이들은 늘 주변을 경계하고, 인기척만 느껴져도 쏜살같이 달아나기 바빴다. 하지만 여기 마닐라의 고양이들은 다르다.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눈꺼풀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심지어 발로 툭 건드려도 하품 한번 하고 다시 잠들 뿐이다. 이 고요함이 이 열대 기후 때문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주는 스트레스가 없어서일까? 나는 조심스레 후자에 한 표를 던진다. 이 녀석들처럼, 나도 때로는 이 세상의 모든 염려를 내려놓고 뜨거운 길바닥 위에 축 늘어져 쉬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오픈은 언젠가 하겠지: 마닐라식 시간 개념

고양이들만 느린 게 아니다. 마닐라의 사람들도 참 느리다. 한국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여기선 일상처럼 벌어진다. 예를 들어, 새로운 상가가 오픈한다고 간판을 걸면 보통 '몇 월 며칠 오픈!' 하고 날짜를 적어 놓는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는 단 한 번도 그 날짜에 맞춰 문을 여는 가게를 보지 못했다. 몇 달은 예사고, 심지어 1년이 넘도록 오픈 날짜만 덩그러니 걸어둔 채 텅 비어 있는 가게도 보았다. 처음엔 정말 답답했다.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느리고,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 걸까?' 속에서 천불이 나는 기분이었다. '빨리빨리'가 익숙한 한국인의 피가 끓어오르는 순간들이었다.


내려놓음의 마법: 스트레스 제로 라이프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었다. 내가 바라던 원하지 않던, 마닐라에서의 삶은 반강제로 '느리게 사는 삶'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순간부터 스트레스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조바심 내지 않게 되었고, '무슨 일이든 되면 좋은 거고, 안 돼도 뭐 어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러워졌다. 한국에서처럼 모든 것이 빠르고 정확하게 진행되는 삶에도 분명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만큼 나 역시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끝없는 부담감이 따른다. '뒤처지면 안 돼', '실수하면 안 돼'라는 압박감 속에서 사는 삶은 때로는 지쳐버리게 한다.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다"는 삶의 지혜

필리핀 사람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한다.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 처음에는 그저 무책임하게 들렸던 이 말이, 이곳에서 살아가면서 점차 심오한 삶의 지혜로 다가왔다. 사람 사는 일이란 결국 우연의 연속이고,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통제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당히 포기하고, 적당히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삶도 나름 괜찮다는 것을. 완벽하게 계획하고 통제하려 들 때보다 오히려 마음이 더 편안해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마치 강가에 띄워 보낸 종이배처럼,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자유로움이랄까.


삶의 다양한 속도, 그리고 나의 선택

마닐라의 고양이들과 사람들처럼, 나도 '느리게 사는 미학'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모든 것이 빨리빨리 진행되어야만 미덕인 줄 알았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기다림의 미학, 여유의 가치를 알 것 같다. 삶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고, 나름 느리게 사는 것도 충분히 괜찮은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마닐라가 나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당신의 삶은 어떤 속도로 흐르고 있는가? 가끔은 잠시 멈춰 서서, 마닐라의 고양이들처럼 나른하게 햇살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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