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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만 원짜리 생명과 썩는 쓰레기 냄새 사이에서

필리핀에서 배운 감사함, 당연했던 모든 것이 특별해진다

by JOYCOCO

필리핀 마닐라의 뜨겁고 습한 공기 속에서, 나는 매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질문과 마주한다. '모든 인간은 인권에 의해 보호받아야 하며, 평등하고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당연한 명제가 이곳에서는 너무나도 멀게 느껴진다. 내가 목격하는 필리핀의 현실은 슬픔과 경악을 넘어, 이제는 일상 깊숙이 파고든 불안감으로 나를 짓누른다.


가장 먼저 나를 멈춰 세우는 것은 생명의 경시이다. 이곳에서는 5천 페소, 우리 돈으로 고작 12만 원이면 청부 살인이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떠돈다. 더 놀라운 것은, 불법 총기가 5만 원 정도면 암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12만 원이면 사람의 목숨을, 5만 원이면 생명을 위협하는 흉기를 손에 넣을 수 있다니, 이쯤 되면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다. 심지어 필리핀 사람들은 마치 흔한 물건처럼 자동차 콘솔박스에 총기를 소지하고 다닌다고 하니, 이곳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줄 위를 걷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충격적인 이야기도 들었다. 만약 실수로 사람을 치고 지나갔을 경우, 후진해서 다시 한번 사람을 밟는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중상을 입었을 경우 막대한 병원비를 지원해 줘야 하지만, 죽었을 경우 장례비 정도만 주고 합의를 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경찰들에게 뒷돈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에 사라진 관행이지만, 이곳 경찰들은 공공연하게 뒷돈을 요구한다. 생명의 가치가 돈으로 흥정되는 참담한 현실이다.


충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난 주말, 마닐라의 '강남'이라 불리며 안전지대로 여겨졌던 보니파시오 글로벌 시티(BGC) 한복판에서, 대낮에 한 남성이 ATM 기계에서 돈을 뽑던 중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반짝이는 고층 빌딩 숲 아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벌어진 끔찍한 총성. 안전하다고 굳게 믿었던 곳에서조차 이런 일이 벌어지니, 마치 땅이 꺼지는 듯한 절망감이 밀려왔다. "이제 도대체 어디가 안전하다는 걸까?" 하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힌다.


"Sorry po": 체념의 언어와 쓰레기 산의 그림자


필리핀 사람들의 입에 달고 사는 "Sorry po" 라는 말은 이제 내게 단순한 사과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필리핀에서 사용하는 따갈로그어에서는 문장뒤에 'Po'를 붙여서 존대를 나타낸다.) 부당한 상황이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마주했을 때,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거나 변화를 요구하기보다는 그저 "Sorry po" 한마디로 모든 것을 덮으려는 듯한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 가슴을 아프게 한다. BGC 총격 사건에 대한 현지 뉴스 댓글들을 봐도 비슷하다. "안타깝다", "무섭다"는 반응과 함께, "어쩔 수 없다", "그냥 조심하는 수밖에"와 같은 체념 섞인 댓글들이 대부분이다. 마치 이 모든 불행이 정해진 운명인 양 받아들이는 모습은, 이 사회의 깊은 좌절감을 드러내는 것 같아 마음이 저민다.


마닐라의 빈부 격차와 사회적 불안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공간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마닐라의 한쪽에는 쓰레기 마을 톤도가 있다. 이곳에서는 여전히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사람들과,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5만 원짜리 총을 은닉했을지도 모를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아파트 3층 높이로 쌓인 쓰레기 산 아래, 그 지독한 악취 속에서 아이들이 쇠붙이를 찾는 모습은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이다.


다른 한쪽에는 화려한 고층 건물과 잘 정돈된 거리, 고급 상점들이 즐비한 BGC가 있다. 하지만 이곳마저 대낮의 총격 살인 사건으로 그 빛을 잃어간다. 돈과 권력이 있다고 해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현실을 깨닫게 하는 끔찍한 사건이다. 이 두 공간은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생명의 가치가 하찮게 여겨지고 폭력이 만연한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섬뜩하게도 서로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대한민국, '평범함'이라는 이름의 축복


총성이 울리지 않는 거리, 대낮에 안심하고 은행 업무를 볼 수 있는 환경. 한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이곳에서는 그저 간절한 바람이 된다. 필리핀에서의 삶은 나에게 대한민국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안전하고 소중한 곳인지 매 순간 깨닫게 한다. 때로는 한국의 빡빡한 일상에 투정 부리기도 했지만, 이곳에서는 그 모든 것이 너무나 감사하게 느껴진다. 밤늦게 거리를 걸어도 불안하지 않고, 기본적인 인권이 보장되는 삶. 이것이 바로 '평범함'이라는 이름의 위대한 축복이다.


마닐라의 불안한 공기 속에서 나는 매일 감사함과 함께 깊은 슬픔과 무력감을 느낀다. 12만 원이면 사람의 목숨을, 5만 원이면 생명을 위협하는 총기를 구할 수 있고, 안전하다고 믿었던 곳에서조차 대낮에 살인이 벌어지는 이 현실 앞에서, 과연 인간의 존엄과 안전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BGC의 핏빛 경고는 나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 안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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