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의 교환 학생
이전 글에서 독일에 대해 툴툴거리며 불평불만을 얘기했지만 막상 독일에서의 공부는 즐거웠다. 교환 학생을 오기 전에 졸업 이수 학점을 거의 다 채워서 학점에 대한 부담도 없었고, 논문을 써야 했지만 교환 학생을 하면서 논문을 쓰면 이곳에서의 생활을 즐기지 못할 것 같아서 논문은 화끈하게 미뤄버렸다. 교환 학생을 오기 전에 논문 자료 수집도 끝낸 상황이라 남은 건 엉덩이를 붙이고 쓰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리고 즐기기로 했다.
욕심은 또 많아서 초반에 이런저런 관심 있는 과목들을 다 수강 신청했다가 이론적인 수업은 중간에 취소를 해 버리고 좀 더 실용적인 수업들로 한 학기 수업을 구성했다. 그래서 선택한 과목들은 독일어, 'Exploring Virtual Reality(VR)', 'Film making' 수업이었다.
우선 독일어 수업은 선생님이 종이를 많이 사용하는 것 빼고는 정말 만족스러웠다. 독일어가 어려운 언어 중 하나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더 복잡하고 어려운 핀란드어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와서인지 독일어의 문법이 더 간단하고 쉽게 느껴졌고 독일어라면 한 번 도전해 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느꼈던 것은 선생님의 노련한 수업의 힘이 컸다. 독일어 선생님은 60대의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었는데, 산만한 학생들을 데리고 차분하고 조용하게 수업을 잘 이끌어 나갔고, 간결하고 명료하게 문법을 이해시키면서 머리에 쏙쏙 정리되어 들어오게끔 가르쳐 주셨다. 오랜 시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쳐 온 내공이 느껴지는 선생님이었다.
학기 시작 전에 비용을 내고 수강 신청한 사람들에 한해 독일어 수업을 미리 시작했는데, 3주 동안 거의 5시간 동안 매일 진행되는 스파르타식 수업이었다. 그래도 그 선생님이 진행하는 수업은 힘들고 지루하다고 느껴지질 않았고 독일어 공부가 너무 재미있었다. 원래 외국어 공부를 좋아하고 나름 습득이 빠르다고 생각했다가 핀란드에 가서 핀란드어의 벽을 넘지 못해 주눅 들어 있었는데, 독일어를 공부하면서 약간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Exploring Virtual Reality' 수업은 4일간의 짧은 워크숍으로 구성되어 있는 수업이었다. 사실 짧은 수업 동안 학점을 취득하고 자유 시간을 더 가질 수 있어서 이 수업을 신청한 것도 있었지만, 게임이 아닌 다큐멘터리와 VR이 결합한 수업이라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수업은 워크숍을 위해 영국에서 방문한 교수와 브레멘 대학의 교수가 함께 진행했다. 첫날은 다큐멘터리에 대한 이론적인 내용을 개략적으로 알아본 후, 워크숍에서 제공할 3가지의 다른 주제(감옥 독방, 시리아 난민, 난민 선박)로 구성된 VR 기기인 Google Cardboard viewer, Oculus로 각자 직접 체험해 보고, VR 기기를 사용해 짧은 영상을 만들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워크숍 때 사람들에게 사용 방법을 설명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직접 체험해보는 것이 중요했다. 기기를 착용하고 서서 허우적대며 사방을 헤매고 다니는 친구들을 보며 웃기도 하고 이 기기를 사용해서 어떻게 영상을 만들 수 있는지 짧게나마 경험해볼 수 있었던 흥미로운 날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VR 체험은 그냥 평면적인 화면에서 보는 다큐멘터리 영상보다 주는 울림이 컸다.
하루 동안의 수업이 끝나고 우리는 워크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브레멘 시내에 있는 작은 예술 영화관에서 영화제가 열리는데, 우리는 상영관 한 곳에서 영화제에 참여한 관객들을 모시고 VR 체험을 제공하고 소감 및 피드백을 받는 것이었다. 극장에 모여서 VR 기기를 어디에 어떻게 설치할지, 디스플레이 화면은 어떤 식으로 구성할지, 피드백은 어떤 식으로 받을지 등을 다 같이 의견을 나누면서 준비했다. 교수는 기본적으로 해야 할 것들에 대한 가이드라인만 주었고 학생들이 주가 되어서 의견을 공유했다. 다행히 다들 적극적으로 준비에 참여해서 준비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다음날부터 워크숍이 시작되었고 워크숍이 진행되는 상영관 바로 옆에 다과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그곳에서 관객들을 안내해 VR 체험을 제공했다.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라 VR 기기를 보며 낯설어하고 체험하지 않고 가는 몇몇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사람들이 체험에 참여해 주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긍정적인 의견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보면서 멀미가 나서 힘들었다는 의견도 있었다. 영화 상영 중이라 관객이 없을 때면 옆에 가서 다과를 먹거나 우리끼리 다른 주제의 VR 체험을 다시 해 보면서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다른 학생들은 친구들을 데리고 오기도 했는데 나도 친구들을 초대해서 체험에 참여해보게 했다.
이렇게 3일 동안의 워크숍이 끝나고 우리는 각자의 소감과 감상 및 참여한 관객들의 의견과 피드백을 공유한 후 리포트로 제출하면서 이 수업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Film making' 나보다 1년 전에 교환학생으로 브레멘에 왔던 핀란드 친구의 추천으로 신청하게 되었다. 이 수업은 나에겐 새로운 도전이었는데, 한 학기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학생들이 영화를 다 준비 및 제작하고 완성한 후 시사회까지 마치는 일정이었다. 첫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대략적인 일정을 짜 주셨는데 과연 이 일정대로 진행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특이한 점은 교수님은 최대한 영화 제작에 경력이 없는 학생들이 이 수업을 듣기를 원했다. 마침 한 명을 제외하고 다들 영화 제작은 처음이라 다들 막연하고 우왕좌왕하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수업은 매우 효율적으로 진행되었다. 영화에 대한 이론 설명은 과감하게 뛰어넘고 대략적인 스케줄을 짠 후 바로 스토리 구성 연습에 들어갔다. 우선 교수님과 다 같이 인물 한 명 한 명을 설정하면서 각자의 이야기와 인물들 간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확장해나갔다. 그다음 소그룹을 만들어서 좀 더 디테일하게 연습을 했고, 다 같이 모여 발표를 하면서 추가적인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다음 수업까지 각자 혹은 소그룹으로 스토리를 만들어서 온 후 발표해 다수결로 하나의 스토리를 정하도록 했다.
그다음 시간에는 영화의 스토리를 결정했다. 기발한 이야기와 흔해빠진 이야기가 오고 가는 중에 우리가 선택한 이야기는 간단히 말하면 과거의 트라우마로 고통받아온 한 여성이 자살을 앞두고 임신과 출산을 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나름 드라마틱한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결정한 후에는, 곧바로 팀을 나누었다. 감독, 시나리오, 제작, 편집, 홍보, 캐스팅 등으로 팀을 나누고 각자 하고 싶은 팀에 들어가서 연습 및 준비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영화 제작과 communication을 담당하기로 했다.
그 이후 수업부터는 팀별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시나리오팀은 스크립트를 쓰기 시작했으며, 편집팀은 캐스팅과 시사회에 쓸 포스터를 만들기 시작했고, 캐스팅팀은 캐스팅 일정 및 장소를 섭외하기 시작했다. 내가 있었던 제작팀은 교수님으로부터 카메라, 마이크, 조명, 음향 기기를 제공받아 실내 및 야외에서 연습하기 시작했다. 나는 음향 쪽에 관심이 있어서 마이크를 주로 담당하면서 연습했다. 또한 communication 담당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자료를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과 왓츠앱 그룹을 만들어서 관리했다. 매주 수업 시간에 모여서 각 팀별로 진행 과정을 공유하면서 연습을 계속했고, 다행히 스크립트가 빨리 완성되어서 일정대로 문제없이 준비할 수 있었다. 캐스팅, 촬영 장소 섭외, 촬영 장비 및 물품 준비가 모두 끝났고, 총 3일 동안 실내 및 야외 촬영을 하는 것으로 촬영 날짜가 결정되었다.
촬영 첫날, 아침 일찍 학교에서 만나 촬영 장비를 챙긴 후 실내 촬영 장소로 향했다. 다들 기대감과 열정에 가득 차 촬영을 준비했다. 감독과 촬영팀은 촬영 동선을 정하고 다른 사람들은 소품 등 다른 준비를 도와주었다. 나는 엉겁결에 메이크업도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는 나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화장을 하지 않았으며 무언가 아시아인은 화장을 잘할 것 같다는 기대도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엔 못 하겠다고 하다가 아무도 나서지 않아서 그냥 내가 가지고 있던 파운데이션으로 메이크업을 해주었다.
영화를 만드는 일이란 지루한 기다림을 버티는 일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장소가 좁아서 감독, 조감독, 제작팀을 제외하고는 방에 들어갈 수 없었고 사람들은 다른 방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다들 촬영 현장을 보고 싶어 해서 몇 명씩 돌아가면서 방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다가 나중에는 지쳐서 그냥 다른 방에서 널브러져서 수다를 떨다가 돌아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실내 촬영 둘째 날에는 사람들이 대거 불참했다. 전날 그렇게 줄곧 기다리기만 했으니 그럴 만도. 덕분에 소수 정예(?)로 촬영을 할 수 있었으며, 참여한 사람들은 촬영 현장에 모두 투입될 수 있었다. 나도 메이크업과 음향을 담당하며 최선을 다해 참여하려고 했다. 다들 첫날보다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이날 실내 촬영은 일찍 마무리할 수 있었다.
촬영 마지막 날이자 야외 촬영 날에는 다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공원에서 하는 야외 촬영이라 움직임도 많고 촬영 시 공원을 산책하는 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통제해야 하는 일도 있어서 실내 촬영보다 많은 사람이 필요하긴 했다. 촬영은 거의 하루 종일 걸렸고 역시나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공원 호수에서 보트 씬이 있었는데 남자 배우가 노 젓는 방법을 몰라서 다 같이 보트를 이동시키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도 6월의 초여름이라 온통 초록빛의 싱그러운 공원과 상쾌한 바람이 기다리는 지루함을 달래주었다. 이렇게 총 3일 동안의 촬영이 끝났다.
그다음 주에는 다 같이 모여 앉아서 편집 전 촬영본을 감상했다. 우리의 작업물을 보면서 빵빵 터져서 웃기도 하고 감탄을 하기도 했다. 어찌 됐건 결과물을 보니 뿌듯했다. 이제는 편집팀이 실력을 발휘할 차례. 편집팀은 분주해졌고, 우리 제작팀은 후시 녹음을 하기 시작했다. 교수님이 피아노와 작곡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섭외를 해 놓으셔서 그 친구들도 영화 음악에 참여를 해 주었다. 캐스팅팀은 우리의 작품을 공개할 영화 상영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독일어 시험과 시간이 겹쳐서 나는 영화 상영회에 참여할 수가 없었지만 마지막 수업 시간에 한 명씩 돌아가면서 소감을 말하고 수업을 마쳤다. 20분 정도 분량의 단편 영화에도 한 학기 동안 이렇게 많은 시간과 준비와 팀워크가 필요한데 장편 영화는 얼마나 오랜 준비와 시간, 인내심과 기다림이 필요할까 싶었다.
이렇게 한 학기를 알차게 보내며 독일에서의 교환 학생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