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상하다. 나는 지옥에서 올라왔는데?
* 글쓴이가 경험한 가정 폭력과 학교 폭력을 다루고 있으니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첫 번째 대학에 다니던 시절. 성별과 학업 성취, 그리고 또래 집단에 융화하는 정도의 연관성에 관한 흥미로운 논문 하나를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논문이 던진 화두는 "또래 집단에 융화되기 위해 학업 성취를 일부러 낮추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느 쪽 성별에서 더 두드러지는가?"였다.
논문의 주된 근거는 설문조사였고, 수많은 여자아이가 "또래 집단에 섞이려고 일부러 공부를 덜 하거나 숙제를 안 한 척한 일이 많다."라고 답했다는 모양이다.
나는 논문을 다 읽고 생각했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소녀들은 다들 참 눈치가 좋은 것 같다고. 애석하게도 나는 사는 내내 그런 쪽으로는 눈치가 없었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기초 학력을 보기 위해 입학 예정된 학생에게 국어/수학/영어 과제를 주었고, 과제 채점 결과 나는 300명가량의 학생 중에서 100위권 바깥의 성적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낙후된 구도심과 발전한 신도심의 학생들이 무작위로 섞여 학군 내의 아무 학교에나 배치되던 당시 상황에서 용케 200위권 바깥까지 안 나갔다 싶다.
부모가 적당한 평수의 아파트에 살며 자식의 학업에 일찌감치 관심을 가진 집과, 부모가 화장실도 없는 집에서 자식을 방치하듯 키우는 집의 차이가 고작 100등 정도? 굉장히 적지 않은가?
심지어 나는 정말 눈치가 없게도, 그 등수 차이를 단숨에 메워버렸다.
중학교에 가보니, 같은 반 아이들은 다들 학원을 다니느니 과외를 받느니 참고서를 하루에 몇 장식 푸느니 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이 웃는 낯으로 "너는 학원도 과외도 안 해? 좋겠다!" 하던 태도가 얼마나 기만적이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좋은 정보를 얻은 것이다. '학교 공부에 필요한 책이 교과서 말고도 있구나? 학원이나 과외는 꿈도 못 꾸지만 참고서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게 된 정보를.
낯빛이 핼쑥한 어머니께 "공부를 해보고 싶어서 참고서를 사려고 하는데 그래도 되나요?"하고 여쭤보자 "열심히 하렴." 하시며 장롱 깊숙이 둔 비상금 봉투에서 만 원을 꺼내주셨다.
이만큼의 돈이면 콩나물국이 몇 끼, 두부가 몇 모,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8천 원짜리 참고서와 2천 원어치 공책을 샀다. 어지간한 책 한 권이 5천 원 하던 시기에 참고서가 8천 원이나 했으니, 내 삶 최초의 참고서는 당연히 내용이 알찼다.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전교에서는 8등, 반에서는 1등이 됐다.
성적우수자로 선정되어 학급 조회 때 상장을 받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반 아이 중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아니, 박수는커녕 나와 눈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담임 수녀님께서 건네주시는 상장을 받으며 자리로 돌아오는데,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와중에 입학 당시에 반 1등이었던 아이만이 무슨 드라마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절로 등골이 서늘해지는 이질감 속에서 그제야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돌림이 시작됐다.
따돌림의 구실은 우습게도 "우리 학년 6반까지밖에 없는데, 왜 쟤는 반 1등이면서 전교에선 8등이야? 우리 반이 다른 반보다 못한 것 같잖아."라는 입학 당시 반 1등이었던 아이의 말이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받아 되뇔 정도로 머리가 말랑한 열네 살 밖에 없는 교실이었다.
담임 수녀님이라는 표현이 생소할까? 그 학교는 천주교 재단이 세운 미션 스쿨이라 교원 자격이 있는 수녀님이 몇 명 계셨고, 심지어 고등학교는 교장 선생님이 아니라 교장 수녀님이었다.
성모 마리아 상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 왼쪽은 그대로 중학교 건물, 오른쪽은 언덕을 올라 고등학교 건물. 종교적 폐쇄성으로 순결한 여자아이를 육성한다며 최대 6년을 모아놓는 그곳에서 나는 3년은 왼쪽, 다시 3년은 오른쪽에서 지냈다. 돌아보면 참 순결하긴 순결한 아이들이었다. 순결한 열등감으로 사람을 6년이나 괴롭힐 수 있다니.
중학교 1학년 담임 수녀님은 정말 좋은 분이셨다. 자신은 음악 교사라 음악실에만 있어 잘 모르겠지만 교사용 참고서는 출판사에서 학교에 보내오곤 하니 아마 교무실에서 받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하지만 막상 교무실에 가서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교사용 참고서와 공책 대신으로 삼을 이면지를 가득 받으니, 나를 따돌리던 아이들은 그것으로도 "쟤는 선생들한테 알랑거려서 저런 것도 받아온다, 재수 없어." 하며 새로운 따돌림 이유로 삼았다.
음악 수업이 끝나 마지막으로 음악실에서 나가면 신발장에 실내화가 없었다. 양말 신은 채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화장실 변기에 버려진 실내화를 꺼냈을 때는 생각했다.
'그래도 학교 화장실은 우리 동네 공동 화장실과 다르게 수세식이라 오물은 안 묻었네. 이 정도면 그냥 물웅덩이를 잘못 밟았다고 여길 테니 어머니에게 딱히 변명하지 않아도 되겠다.'라고.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뒤에는 새삼스럽게, 어디에도 기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려, 수업 종이 울려도 교실로 돌아갈 수 없었다.
돌아보면 중학교 2학년 때 전교 조회에서 한 번에 네 번 단상에 올라가 표창을 받은 것도 큰 원인이었다. "잘난 척하는 것 같다."라거나 "우리를 같잖게 여긴다."라는 뒷말이 돌았다. 글쎄, 자기 PR을 요구하는 요즘 시대에는 "잘난 척이 아니라 정말 잘났다."라거나 "피해의식 버리세요, 자의식과잉 그거 큰 문제입니다."같은 말로 방어할 수 있었겠지만 그 시절 여자아이가 또래 사이에서 잘난 척을 하거나 또래를 같잖게 여기는 것은 그냥 꼬리표만 붙어도 따돌림을 당할 정도의 중죄였다.
그에 더해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정말로 큰 실수를 저질렀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실업계를 폄하하고, 성적이 좋은 아이는 무조건 인문계에 가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성적이 좋았을 뿐 또래 사이에서 완전히 고립된 나는 다른 아이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에 상당히 무지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뭐지? 아, 대학 가려는 시험이 있어? 그렇구나. 왜 대학은 수학만 중요하게 보지? 나는 수학이 80점 밖에 안 나오니까 대학은 못 가겠네."
"대학을 못 간다면 실업계에 가서 일찍 돈을 버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직도 2주에 한 번은 쌀통이 비고, 어머니가 저녁밥을 한 숟갈만 드시는데."
그렇게 내가 부모님과 의논 한 번 하지 않고 실업계 진학을 희망한다고 적는 바람에, 성과급 때문에 한 명이라도 더 인문계에 보내려고 혈안이던 교무실이 발칵 뒤집혔다.
나를 싫어해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던 아이들은 "쟤 어차피 인문계 갈 거면서 선생님들 관심받으려고 쇼하는 거다."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중학교 3학년 담임은 끝내 바쁜 내 어머니를 불러 대체 자식을 어떻게 키우기에 실업계를 간다는 소리를 하냐고 추궁했다.
어머니는 "제가 딸을 너무 없이 키워서 그렇습니다. 인문계에 꼭 보내겠으니 더는 딸을 탓하지 말아 주세요." 하며 내 앞에서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거짓말 같겠지?
하하!
내가 다니던 미션 스쿨은 중학교에서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로 진학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고작 몇십만 원이어도 돈이 생긴 것은 좋지! 같은 장학금을 받기 위해, 나를 질시하던 천진하게 못된 그 아이들도 죄다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했다는 점이 문제였을 뿐이다.
그 선택의 결과로 나는 그때까지 만나본 적도 없는 친구에게 "아, 네가 그 눈이 기분 나쁜 애야?" 소리를 듣거나, 문이과가 갈려 성적 압박이 본격적으로 심해진 고등학교 2학년 때는 계단에서 떠밀려 발목이 부러지거나 했다.
지금까지도 어머니는 내가 그때 발목이 부러진 것이, 내가 마을버스에서 내리다가 발을 잘못 디뎠기 때문이라고 아신다. 나는 그 시절부터 이미 천재적인 거짓말쟁이여서 어떤 어조로 얼마 정도 한숨을 섞어 말하면 어머니가 내 말을 그대로 믿는지 알고 있었다.
뭐, 어쩌겠는가? 매일 밤마다 병원 야간 당직을 서야 하는 어머니가 낮에 교무실에 설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발목 좀 부러지고 하는 것은 어차피 아버지에게도 오빠에게도 맞아서 곧잘 겪은 일이라 그때의 나는 특별히 여기지도 않았다.
다만 집에서는 잠을 잘 수 없었고
학교에서는 화장실이 아니면 숨을 쉴 수 없었고
내내 무릎이 떨려 계단에서 주저앉았다.
특별히 여기지도 않은 수많은 것의 누적으로 나는 기어이 고등학교 3학년 때 등교가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아침에 집은 나오는데 버스에서 내리질 못하거나, 아예 도서관으로 도망쳐버리거나 했다. 그럼에도 고3 담임 선생님만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성적이 좋아서 그런가요?"
"맞아."
"글을 잘 써서 그렇고요?"
"그래."
글쎄. 그 말씀이 진심이었다면, 매미가 단말마를 뱉던 그 늦여름에 그분 손이 그렇게 차갑진 않았겠지. 하지만 그때 나는 진심으로 선생님에게 속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게 남은 가능성이 있었으면 했다. 나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세계가 틀렸길 바랐다.
"선생님, 가난과 폭력은 대물림된대요. 책에서 읽었어요. 앞으로 얼마나 살든 제 삶은 괴로울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해요. 결과가 정해져 있다면, 지금 포기해도 아무 상관없는 것 아닐까요?"
"내가 첫 수업에 뱉었고 네가 반박했던 말을 기억하니?"
"역사는 언제나 발전한다고 하셨어요. 저는 오히려 퇴보한다고 말했고요."
"그래. 그러니 네 역사를 쌓아보자."
"무슨 수로요?"
"우선 대학에 가자. 지옥 같은 6년보다는 좀 더 넓은 곳에 가서, 그래서 발전하는지 퇴보하는지 보자. 천재가 분명한 내 제자와의 첫 논쟁에 결론이 지어지지 않으면, 후세에 내가 비웃음을 당하지 않겠니."
그분은 근현대사를 가르치셨고. 나는 그분처럼 되고 싶어서 사회교육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잊어선 안 될 것은, 대학생 대부분은 우리 집 같은 빈곤을 평생 겪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람 대부분은 자신이 평생 겪을 일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줄을 모른다.
"너 과 설문조사에서 시골에서 올라온 것 같은 애래."
아무리 그래도 과 수석인 나를 상대로 시골에서 올라온 애가 아니라 화장도 안 하고 못생긴 남자 점퍼만 입는 가난한 애라고 정확히 면전에서 뱉기엔 내 동기도 솔직히 조금은 겸연쩍었을 것이다. 자신에게는 어떤 악의도 없었는데 받아들이는 상대가 농담에 예민하게 반응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런 류의 인간이 곧잘 하는 짓이니.
살면서 몇 번이고 겪은 방식의 말이라 무척 지루했지만 소득은 있었다. 적어도 내가 어떤 식으로 보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으니까.
2학기 교재를 사라고 건네받은 어머니의 카드를, 딱 한 번, 세 벌의 옷과 구두 하나를 사기 위해 썼다. 정확히 20만 원. 나는 그 돈을 쓰고 어머니에게 뺨을 맞은 뒤 이런 말을 들었다.
"네가 제정신 박힌 년이야?"
르네 마그리트 같은 것을 많이 보아야 좋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 여자는, 통장에서 20만 원이 한 번에 빠져나가면 딸의 따귀를 날릴 수 있는 여자이기도 했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에야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그때는 악에 받쳐서 첫 번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무섭게 20만 원을 다시 돌려드렸다. 하지만 그것을 제정신 박힌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사실 지금도 모르겠다.
다만, 내 역사를 쌓아보자고 꼬드긴 그날의 선생님과 비슷한 나이가 되니 역시 그날 선생님께 속아넘어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분 말씀대로 대학에 갔지만 10년 동안 온갖 지랄을 겪고 끝내 고졸로 살게 된 내게 사회가 기대하는 가능성 같은 것이 없었대도, 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세계가 옳았대도, 역사가 가득 쌓인 내게는 이제 아무래도 좋은 일이라서다.
아무래도 열아홉에 나로 살기를 끝냈더라면 이런 감각은 못 느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일이 참 재미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