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 인간, 2. 텅 빈 대화방의 ‘ㅋㅋㅋ’

우리는 효율적으로 안부를 물었고, 효율적으로 멀어졌다.

by 닥터 F

스마트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 K였다. 대학 시절, 술에 취하면 서로의 자취방에서 미래의 불안을 안주 삼아 밤새 떠들던 친구. 1년, 아니 2년 만인가. 화면을 켜자 그의 긴 메시지가 떴다.


"야, 잘 지내냐? 나 이번에 회사 그만두고 좀 쉬고 있어. 갑자기 네 생각나서 연락해봤다. 사는 게 참 퍽퍽하다, 그치?"


그의 텍스트에서는 소주 냄새가 났다. 아니, 젖은 낙엽 같은 눅눅한 우울이 묻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엄지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을 것이다. '무슨 일이냐', '당장 나와라', '어디가 그리 힘드냐' 같은 투박하지만 뜨거운 문장들을 오타까지 섞어가며 입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2025년이다. 그리고 나는 방금 퇴근해 소파에 늘러붙은, 배터리가 5% 남은 지식 노동자다. 텍스트 입력창 위로, AI가 분석한 '스마트 답장(Smart Reply)' 추천 문구 세 개가 둥둥 떠올랐다.


"헐, 진짜? 무슨 일이야? ㅠㅠ" (공감형)


"고생 많았네. 당분간 푹 쉬어." (위로형)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ㅋㅋㅋ 시간 될 때 밥 한번 먹자." (현실타협형)


AI는 K의 문맥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저 세 가지 선택지 중 하나만 누르면 된다. 그러면 나는 고민할 필요도, 타자를 치는 수고로움도 없이 '적절한 친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장 무난하고 쿨해 보이는 3번을 터치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ㅋㅋㅋ 시간 될 때 밥 한번 먹자."


전송 완료. 소요 시간 1.5초. 나의 손가락은 고민하지 않았고, 나의 뇌는 문장을 조립하느라 에너지를 쓰지 않았다.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효율적으로 친구를 위로했다(고 시스템은 판단했다).


곧이어 K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 역시 AI가 추천해 줬음이 분명한, 혹은 습관적으로 자동 완성된 문장이었다. "그러게 ㅋㅋㅋ 그래, 조만간 보자."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조만간'이라는 단어가 기약 없는 영원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채팅방에는 적막이 흘렀고, 화면 속에 남은 것은 의미 없이 부유하는 'ㅋㅋㅋ'라는 자음 세 개뿐이었다.

나는 꺼진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방금 대화를 한 것일까, 아니면 데이터 패킷을 교환한 것일까.


'ㅋㅋㅋ'는 21세기가 발명한 가장 효율적인 방어기제다. 그 웃음소리 없는 웃음 뒤에는 '더 이상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권태와, '심각해지는 분위기는 질색'이라는 회피가 숨어 있다 . AI는 그 얄팍한 속내까지 학습하여,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답변을 제공한다.


내가 직접 자판을 두드렸다면 어땠을까. '야'라고 쓰고 지우고, '힘드냐'라고 썼다가 너무 무거운 것 같아 다시 지우는 그 망설임의 시간들. 백스페이스 키를 누르며 고르는 단어들 속에 진심이 묻어났을지도 모른다. 비록 오타가 나고 문맥이 투박하더라도, 그 비효율적인 시간이야말로 관계의 밀도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간을 '낭비'라 부르며 삭제해버렸다. AI가 써준 매끄러운 답변 덕분에 우리는 오해를 살 일도, 감정을 소모할 일도 없어졌다. 서로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매끄럽게 안부를 묻고, 매끄럽게 멀어지는 기술.


우리는 너무나 효율적으로 타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채팅방 목록에서 K의 이름이 아래로 밀려난다. 나는 침대에 누워 생각한다. 아까 내가 보냈어야 할 진짜 답장은 무엇이었을까. 추천 문구에는 없었던,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오답 같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야, 사실 나도 죽겠어. 소주나 한잔하자."


그 투박한 문장을 입력하지 못한 채, 나는 다시 유튜브 앱을 켠다. 알고리즘이 추천해 준 영상들이 쏟아진다. 외롭지 않기 위해 접속했지만, 접속할수록 고립되는 기분.


텅 빈 대화방의 'ㅋㅋㅋ'가 비웃음처럼 귓가에 맴도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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