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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fe of ease Apr 14. 2023

[에세이] 직관

끝맺을 수 없는 나만의 대화에 관한 간단한 푸념

나는 직관이 좋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 말을 듣는 것은 기분이 좋은 일이다.

그것이 좋은 의미이든 아니든 그것은 상관없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야기하는 그것이 나에게 좋은 것이라면 그것은 칭찬이 된다.


미친 놈처럼 보이고 싶어서 흥분한 채 흥분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너 진짜 미친 놈이구나"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칭찬이지 욕이 아니다. (물론 그런 말을 한다면 흥분된 행동의 다음 타겟이 될 수는 있다.)


직관이 좋다는 말은, 감각이 좋다는 말처럼 들린다. 눈치가 빠르다는 말이 되기도 하고, 무엇이든 금방 적응하고, 사람의 감정도 잘 파악해서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을 잘 한다는 이야기도 된다. 이렇게 좋은 것들만 말하는 만큼, 나는 직관이 좋다는 말이 좋다.


살면서, '직관'이라고 표현하기는 애매한 것들일 수 있는, 그런 것들이 나의 삶에 무기가 되고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느낌 상 이런 직관이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은 언어습득에 대한 부분인 것 같다. 나는 새로운 언어가 어렵거나 배우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적이 거의 없다. (학교 수능 영어 제외) '직관'적으로 나는 사람들이 내게 말하는 직관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행동을 잘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혼자 생각에 잠길 때는, 때때로 이러한 칭찬과 나에 대한 만족이 나를 쑤실 때도 있다. 직관이 좋다는 의미는 중간 과정 다 모르고 있다는 뜻은 아닌가? 나는 이 사람의 감정은 어떤 것인지, 지금 분위기가 싸해졌는지 느낄 수는 있지만 무엇을 통해서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된 지는 잘 모를 때가 많다.


이러한 부분은 최근 축구 게임을 하면서 나에게 크게 다가왔다. 내가 하는 축구 게임에서는 게임에 들어가기 전 포메이션도 바꾸고, 선수의 위치도 지정한다. 더 나아가, 전술적으로 얼마나 강하게 수비할지, 자리를 지킬 지 선택할 수도 있고, 그러한 것들이 아주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러한 과정들은 모두 나에게 너무나 직관적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나의 하나하나의 작은 선택들을 억지로 설명하려면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설명에 도달하기 위해 다시 머리 속을 뒤집어야 하고, 어둠 속에 눈을 뜬 사람처럼 더듬 더듬 찾아가야 한다.


과거 학창시절부터 나는 '마피아게임' 이라는 소위 말하는 거짓말쟁이를 찾는 게임도 매우 좋아했다.

나는 특별히 좋아하는 역할은 없었다. 어차피 다들 내 말을 믿었고, 내 마음대로 게임을 운영할 수 있었다. 나는 누가 마피아인지 찾을 수 있었다. (틀린 적도 매우 많긴 하다, 그러나 통계적으로 나는 주변인들에게 충분히 신뢰를 주는 직관력을 보여준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항상 밤 중에 마피아가 임의로 1명을 골라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마피아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또는 마피아가 되어서 재밌게 게임을 파괴하거나 두 가지 양상으로 진행하게 되었던 것 같다.


직관력이 좋다는 말이 나쁜 점도 있다는 지점으로 다시 넘어와, 직관력만 좋은 것은 때때로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내 성취를 가로막는 일도 생길 것 같은 불안감을 같이 느낀다. 순간 순간의 선택과 빠른 판단이 요구되는 일상생활에서는 이것이 도움이 된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고 복잡한 것 투성이다. 가령 검색사이트에서 개선되어야 하는 기능, 추가되어야 하는 기능과 서비스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직관으로 판단할 수 없다. 또는 무언가를 디자인할 때에도, 기계를 개발할 때에도 직관이 아닌 철저한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들이 힘들다. 긴 삶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부터 쌓여온 쉽게 쉽게 '직관으로 처리?'하는 버릇이 딱딱하고 무거운 부메랑이 되어서 나를 다치게 하는 것 같다. 이런 것들을 고민하는 것으로 주섬주섬 시간을 쓰고 ATP를 소모하다보면, 결국 내 연구력은 지치고, 지금은 쉬어야 할 때라는 직관이 승리하고 결말은 용두사미에 이르게 된다.


칭찬이라고 말하는 것이든, 또는 그 반대로 비난, 지적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듣는 자가 기준이 되는 것 같다. 칭찬은 대부분 기분을 좋게 하고, 비난과 지적은 대부분 기분을 나쁘게 한다. 그리고 칭찬과 비난에도 직관을 통한 맥락이 담기기 마련이기에, 좋은 칭찬과 좋은? 비난은 대부분은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다. 결정적으로 이러한 생각 끝에, 나는 칭찬과 비난 그 어느쪽에도 영향 받지 않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푸념과 같은 이 글을 마무리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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