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너무 느려

by 헤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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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태눈깔을 아시는가. 모든 것에 흥미를 잃은 그 눈빛이 바로 요즘 내 기본 표정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상담 선생님이든 주치의 선생님이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게 해주려고 애쓰고 계시는데, 그 노력을 자꾸만 배반하게 되는 것 같다. 누군가 좋아하는 것을 묻는다면 머릿속이 하얘질 것 같다. 좋아하는 게 없으니 삶에 재미를 붙이기도 힘들고, 그러면 또 다시 자살사고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지금은 그나마 글쓰기가 나를 지탱해주고 있지만 이 흥미가 언제까지 지속될 지도 솔직히 모르겠다.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였다. 나름 취미 부자라고 자부하며 살던 시절이었다. 나는 세상을 좋아했다. 세상에 있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했었다. 영화관에 일주일이 멀다하고 드나들고, 월별로 다른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한 달에 열 권 넘게 책을 읽었다. 그런데 공황이 오면서 자주 가던 영화관이 못 가는 장소로 밀려나고, 갈 수 있는 곳이 사라지자 플레이리스트를 만들 필요가 없어지고, 우울증으로 글을 읽고 이해하기가 힘들어져 도서관과 멀어졌다. 내가 앓고 있는 이 병은 내 모든 생활을 앗아갔다. 무서운 병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폐쇄병동에 있을 때는 하루가 금방 갔던 것 같다.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먹고, 프로그램을 오전 오후 나눠서 두 번 하고, 가족들이랑 면회를 하고 나면 하루가 끝났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돌기 마련인데, 그럴 땐 환우들과 모여서 루미큐브를 수도 없이 했다. 중학생부터 할머니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루미큐브를 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 투약 시간이었다. 시간표가 나를 대신 살아줬다. 물론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다시는 폐쇄병동으로 돌아가지 않으리... 그렇지만 그 답답한 생활이 차라리 지금보다 낫다는 생각도 가끔 든다.

가야 할 학교도, 만나야 할 사람도 없는 휴학생의 하루 일과는 텅텅 비어있다. 이걸 채워넣는 재미로 휴학을 하는 거 라는데, 좋아하는 것 없음 상태인 지금은 채워넣을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 눈을 꼭 감고 누우면 째깍이는 시계바늘 소리가 크게 들린다. 스케줄 없는 삶 만큼이나 내 속도 비어있는 듯하다. 그렇게 공허함이라는 거대한 구덩이에 머리를 기대어 놓고, 시간이 흐르기만을 괴롭게 기다리기만 한다. 가까스로 벗어나려 해봐도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나는 계속 지기만 하는 느낌이다. 이렇게 아무 일도 없는 하루라면 나는 사라지는 게 낫겠어. 숨이 조여 온다.

이렇게 멈춰 있을 수만은 없다.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제대로 숨을 쉬기 위해, 해야 하는 일 목록으로 하루를 채우는 차선책을 택한다. 일단 주3회 재활센터에 가야 하고, 상담을 받아야 하고, 정신병원에 가야 한다. 여기에 카페에 가야 한다, 글을 써야 한다, 밖에 나가 걸어야 한다 따위도 넣어본다. 그 목록을 따라 미끄러지듯 다음 스텝, 다음 스텝으로 이동하며 살다 보면 무언가를 이뤄낸 내가 보인다. 볼품 없는 하루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작은 보석같은 성취들. 그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기뻐하는 연습을 하려 한다. 언젠가 시간이 다시 흐르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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