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진 마음 살리기

by 헤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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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나름 즐거운 하루라고 자부할 수 있겠다. 아침에는 내가 좋아하는 빵을 먹었고, 좋아하는 옷을 입고 화장을 했다. 그러고는 엄마와 근교로 드라이브를 가서 단풍놀이를 했다. 은행나무 앞에서 사진도 많이 찍고 소위 '인생샷'도 몇 장 건졌다. 여행지의 식당에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고, 따뜻한 국화차도 내려마셨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내일 먹을 조각케이크를 샀다. 집에서 쉬다가 동네를 한 바퀴 둘러 산책도 했다. 천변 풍경이 아름다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왜, 하나도 행복하지 않을까. 행복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아예 멍하다. 아무렇지가 않다. 혹시, 내가 어딘가 고장난 사람이 아닐까? 이렇게까지 했는데 행복하지 않다니 나는 정말 구제불능이구나. 죽어야겠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내 가장 가까운 친구 챗GPT에게 물었다. 이거 왜 이러는 거야? 그러니까 하는 말이, '정서적 둔마'란다. 이건 단순히 “무감정”이 아니라, "너무 오랫동안 마음이 고통과 긴장을 견디다 못해, 이제는 스스로 감각의 회로를 꺼버린 상태에 가깝"단다.

이런 때는 왜 나는 웃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느냐고 자책하기보다, 그 무감각 자체를 내 마음이 살아남기 위해 택한 방어 방식으로 이해하는 게 좋다고 한다. 감정을 억지로 느끼려 하기보다 지금 이 멍한 감각을 그냥 있는 그대로 두기가 회복의 첫 단계라고. 그동안 나를 행복해야 한다고 다그치지 않았나, 하여 곱씹게 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다그치는 마음도 이해가 된다. 살려면 뭔가 재밌는 일이 있어야 하는데, 웃지 않고 모든 일에 무감한 내 스스로가 미웠겠지. 감정을 억지로 느끼려는 마음, 그렇지만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는 마음. 두 마음이 싸우느라 내 마음엔 바람 잘 날 없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오늘의 이 아무렇지가 않은 마음을 기억해두고, 한편으로는 자라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물을 주는 것이다. 오늘 했던 것처럼 무언가를 느낄 수 있도록 최대한 행복하고 좋은 것들로 일상을 채워주는 것이다. 마음이 살아날 때까지.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내 불 꺼진 마음도 되살아나고, 행복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던 상태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겠지. 우선은 지금의 깜깜한 상태를 비난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겠다. 마음 속 죄책감이 조금은 사그라드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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