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격조하였습니다
얼마 간 글을 쓸 수 없었다. 자살사고가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내 글은 '그럼에도 살아내는', 고통 속에서도 다시 한번 일어서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 상태로는 도저히 그런 말랑말랑한 회복의 서사를 써내려 갈 수 없었다. 나는 너무도 자명한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었으므로. 사실 자살시도를 한 뒤로 상황이 나아졌을 리가 없다. 살아냈다는 안도감보다는 오히려 그때 죽었더라면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에 눈물로 하루하루를 지새웠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가 않은 나날들이었다.
그러던 오늘,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는 거라면, 지금 꼭 죽지 않아도 되지 않나. 나는 내가 필요할 때 죽음을 택할 수 있다. 그렇다는 말은, 내가 필요할 때 잘 살아보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나는 죽음 말고도 다른 선택지를 상상해볼 수도 있다. 그제서야 현실이 보였다. 내 곁에 있는 우리 가족들, 거리를 가득 메운 은행나무, 벌써 접시에 담겨 나온 딸기같은 것들이. 죽음 이외의 다른 생동감 있는 세상은 눈이 시리도록 찬란했다. 나는 다소 멍한 상태로 그 찬란함에 오래도록 압도되었다.
당장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다. 다만 언제든, 마음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진다면, 계속 살아보는 방향을 택할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선택은 온전히 내 몫이다. 주치의 선생님도, 상담 선생님도, 부모님도 그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나의 것. 그러니까 살고 싶은 이유들을 최대한 많이 만드는 게 내 숙제다. 일단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에세이가 남아 있다. (기회가 된다면 브런치에도 공개하고 싶다!) 또 오늘 저녁에 회를 먹기로 했는데, 맛있을 것 같아서 일단 오늘 저녁까지는 꼭 살아야 한다. 저녁에 가족들이랑 하는 루미큐브도 기대된다.
이런 식으로 매일 기대되는 일들을 만들면, 그리하여 삶이 무채색이 아닌 색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면. 그러면 살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아직은 먼 이야기같지만 당장 오늘 몫은 해내지 않았는가. 문득 상담 시간에 선생님과 이야기나누었던 낙관론적 허무주의가 생각난다. 삶 전체는 무의미하지만, 그중에서 의미를 덧입히는 과정의 재미에 사람은 사는 거라고. 글을 쓰다 보니 제법 해볼 만하게 느껴진다. 글을 씀으로써 내가 이를 실천의 영역에 옮길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