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작은 이슈가 있었다. 빨간 볼펜으로 손목을 긋는 정도의, 뭐 사소한. 각오를 하고 상담실에 들어갔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지난 주부터 나는 지망하는 연구실의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분야 특성상 영문 논문에다 생소한 통계 개념까지 어우러져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오랜만에 공부라는 걸 하는 내 모습에 만족하셨지만, 속으로는 처음 겪어보는 어려움과 막힘에 스스로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중이었다. 그렇게 '자존감 자해'를 하면서 논문을 버벅이며 읽어가던 문득, 나에게 물리적으로 해를 가하고 싶어졌고, 그와중에 지난 시간 선생님과 자해는 하지 않기로 한 약속이 떠올라서 도구로 볼펜을 택한 것이었다. 손목에 그린 선 두 개는 잘 지워지지 않았다.
손목을 덮는 옷을 입고 선생님을 뵈었는데, 얘기를 꺼내니까 선생님이 옷을 걷어 손목을 보셨다. 그리고 양손으로 가만히 어루만져 주셨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이렇게 자해를 하는 것 같냐고 물어보셨다. 일이, 감정이 막힐 때 손목을 긋기라도 하면 순간적으로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선생님께서 자해를 함으로써 감정이 해소되는 것 자체는 인정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겠냐고 말씀하셨을 때 떠오르는 몇 가지 대안들이 있었다. 잠시 쉬다 와도 되고, 단 것을 좀 먹어도 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는 오로지 자해가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느껴진다.
선생님께서는, 자해는 절대 효율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설명하셨다. 내가 처한 문제는 논문이 잘 읽히지 않는 것인데, 자해로 나를 벌한다고 해서 안 읽히던 글이 술술 풀리지는 않는다. 여기까지 듣다가 그런데 논문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건 변함 없이 나이지 않느냐고, 그럼 내게 벌을 줘도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니, 그렇게 나를 벌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느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아니다. 결국 문제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나만 아파지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벌을 해결책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 착각은 습관이 되어버렸고 말이다.
엄마가 나를 혼내듯, 내가 나를 대하고 있다는 말씀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맞다. 나는 우리 집 엄격한 관리자에게 많이 꾸중을 들어봤기에 그게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한지 잘 알고 있다. 방법이 잘못됐다고도 수없이 생각해왔다. 그걸 내가 답습하고 있다니. 직설적인 표현이어서 더 마음 깊이 와닿았다. 적어도 내 속에 어린 시절의 엄마를 두진 말아야지. 그렇지만 이건 오래된 패턴과도 같아서 나도 모르게 엄마 목소리를 따르게 된다. 엄마의 조건부 사랑, 열심히 공부를 하는 딸에게만 한정된 사랑을 학습해 나도 내게 예쁨 받을 조건을 걸게 된다.
나는 나를 기특하게 여겨 본 적이 없다. 그런 말랑말랑한 정서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멀리해 왔다. 오늘 선생님께 지원 시기가 한참 남은 랩의 논문을 벌써 읽고, 대단하고 기특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논문 리딩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이것조차 남들보다 훨씬 뒤처지는 거라고 생각한 나와 너무 상반되는 피드백이어서, 그리고 실은 내가 가장 듣고 싶던 말이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논문을 읽지 않았어도 혜인 씨는 소중한 존재예요"라고 덧붙이셨다. 그러니까 내가 바라온 사랑의 형태는 이런 거구나. 조건이 우연히 맞아 떨어져서 엄마에게 받은 사랑이 충분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 번에는 엄마에게 내가 원하는, 있는 그대로의 나에 대한 사랑을 설명해서 얻어내야지.
확실히 논문 읽기는 고달프다. 노베이스가 괜히 논문 읽는다고 설치다가 반감만 더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힘 닿는 데까진 가볼 예정이다. 대신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느리게. 어차피 얼마가 걸리든 논문을 읽어낼 거라면, 그리고 향후 몇 년간 연구자로 생활할 의향이 있다면, 논문을 되도록 좋은 정서와 연합시켜야 한다는 것이 선생님 의견이다. 나도 동의한다. 일단 자해를 한 것이 어제 일이었으니까, 내게는 휴식이 필요한 것 같다. 충분히 쉬고 방학에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면서, 몸은 바쁘더라도 마음만은 여유롭게 지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