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죠의 삶 Oct 13. 2023

내 인생에는 그랜드 피아노를 놓을 공간이 없다

결혼과 육아를 꿈꾸는 삶에 대하여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 中 '도움의 손길'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는 날 매혹시킬 것이다. 그러나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랜드 피아노가 거실 대부분을 차지하면 우리는 한가운데로 가로지르지 못하고 피아노의 옆면과 벽 사이를 겨우 지나가거나, 밑으로 기어 다녀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고 마음속 울림을 느꼈다. 그것은 씁쓸함도 슬픔도 아닌 공감이었다.


나는 36개월이 된 조카와 언니, 형부와 함께 산다. 조카가 6개월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살았고 대부분의 성장과정을 지켜보았다. 옹알이하며 기어 다니던 작고 따뜻한 생명체가 제법 컸다고 비 오는 날 내가 미끄러지진 않는지 걱정까지 해준다. 그것을 보고 있자면 꽤나 감격스럽다. 나는 아이와 동물을 돌보는데 탁월하지 못한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차분한 성격이기도 하고 아이와 동물들이 뿜어내는 천진함에 도무지 동화되지가 않는다. 그래서 조카를 돌보는데 애를 먹곤 했다. 지금은 익숙해지기도 하고 조카는 의사소통이 가능한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조카와 단 둘이 보내는 오랜 시간이 비로소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너무 사랑스럽고 귀엽다. 내가 이렇게 조카를 좋아하게 될 줄 정말 몰랐다. 그래서 이따금 나의 아이를 가져보면 어떨까 생각이 든다. 그렇게 먼 미래는 아니니, 지금 쯤은 생각을 해봐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언젠가 언니와 나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언니와 나는 계산기를 두드려, 내가 한 달에 얼마를 벌어서 얼마만큼 저금해야 집 사고 결혼하고,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27살부터 돈을 벌어 한 달에 150만 원에서 200만 원 가까이 저금하고, 30대 초반에 나와 비슷한 재산의 남자와 결혼하고, 영혼을 끌어모아 집을 사고, 집 대출금을 잔뜩 남겨둔 채, 남편과 함께 1-2년간 돈을 열심히 모아 아이를 낳으면, 내 나이 35살이었다. 이것도 한 치의 오차와 여유 없이 허리띠를 꽉 졸라매야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게 계산을 마치고 나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 역시 나에게 아이는 그랜드 피아노 같은 거였구나.' 나의 선택에 기회비용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내 취향껏 예쁘게 꾸민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싶다. 그래서 집에서 좋아하는 영화와 드라마를 잔뜩 보고, 카페에서나 볼 법한 음질 좋은 큰 스피커로 재즈를 듣으며, 독서하고 싶었다. 그리고 쉴 때는 남편이나 친구와 함께 캠핑을 가거나, 여행을 가는 삶을 꿈꾸었다. 이런 삶이 아이를 키우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을까? 더 쉬운 선택지인 것은 확실하다. 기회비용이란 어떤 선택으로 인해 포기된 기회들 가운데 가장 큰 가치를 갖는 기회 자체 또는 그러한 기회가 갖는 가치를 말한다. 아이를 낳지 않은 선택을 기회비용으로 친다면 재화적으로는 그 가치가 더 크다. 하지만 기회비용에는 심리적 만족도가 포함된다. 그렇다면, 나는 결코 내 선택이 옳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 쿠르츠게작트에서 한국 저출생에 관한 내용을 다뤘다.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100년 안에 한국의 청년 94%가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100년 안에 한국의 노인이 되어 살고 있을 나를 생각하면, 심각함을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하지만 섣불리 아이를 낳겠다 선언하지 못하겠다. 나를 위해서도 아이를 위해서도 말이다. 언니 부부를 보면 아이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절실히 보인다. 경제적인 노력뿐만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인 노력도 대단하다. 나는 자신이 없다. 나의 아이를 위해 내 인생을 바칠 자신. 오직 그랜드 피아노 케이스가 된 집을 바라볼 자신.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내가 나약하고 개인주의적인 요즘 애들이기 때문일까? 아이들은 그냥 다 어떻게든 크는 건데, 내가 너무 많은 것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아이가 나 같은 유년 시절을 보내게 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이렇게 머릿속으로 숫자들을 나열하고 마음을 다 잡아도 조카의 소중하고 작은 품 하나면 내 견고한 결심에 하나둘 틈이 생긴다. 내 인생에 그랜드 피아노는 과분한 존재일까?

작가의 이전글 인류애(愛)너지 고갈 사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