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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궤도이탈 Mar 30. 2022

19. 공항에서

  게이트가 변경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비행기가 떠난 뒤였어. 나는 공항 직원을 찾아가 되지도 않는 영어로 손짓 발짓 다 해가며 말했어. 이건 불공정하다. 나는 몰랐다(이때 “I didn’t know”라고 했어야 하는데 “I don’t know”라고 하고 말았지). 하지만 공항 직원은 단호했어. 안내방송도 한번 했고 전광판에 게이트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계속 알렸다는 거야. 그러니 그걸 못 본 내 탓이라는 거였지. 나는 어이가 없었어. 아니 그 사람들 많은 공항에서 게이트가 바뀐 중대한 사실을 고작 방송 한 번으로 알아주길 바란 건가? 전광판도 마찬가지야. 작은 영어 글씨로 가득한 거대한 전광판에서 어떻게 그걸 찾을 수 있겠어? 솔직히 내 탓도 완전히 없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도대체 누가 자기가 타야 할 비행기의 게이트가 바뀔 거라 생각하겠냐고. 나는 이런 심정을 말하고 싶었지만 내 영어에는 한계가 있었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잇츠 언페어! 아이 돈 노우! 이게 다였지. 기분 탓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영어를 못하니까 직원이 은근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았어. 나 공부도 잘하고 책도 많이 읽는 사람인데. 젠장.

  직원은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고 나는 하는 수 없이 로비로 돌아왔어. 정말 막막했지. 물론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많았어. 문제는 돈이 없었다는 거야. 일정에 딱 맞춰 예산을 짰고 그 예산대로 계획하고 움직였지.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6박 7일의 홍콩 여행이 멋지게 마무리되는 거였는데, 마지막에 이런 일이 생길 게 뭐람? 집에 연락해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이미 유심칩 반납해버렸는데 어쩌지, 근데 연락한다고 해도 한국에서 홍콩 국제공항 비행기 표를 검색하고 예매하는 복잡한 과정을 해낼 수 있을까, 엄마 아빠는 컴맹이라 불가능하고 그럼 친구한테 부탁을 해야 하나, 근데 나한테 그걸 해줄 만한 친구가 있을까, 머릿속이 몹시 복잡했지. 울고 싶은 마음이었어. 그전까지 드넓은 세계를 여행하는 모험가 같은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어. 한국이 그리웠고 가족이 보고 싶었어. 나는 무기력하게 로비 벤치에 앉아있었지.

  그런데 내 뒤쪽에서 한국말이 들리기 시작했어. 나는 사막에서 오아시스…… 이건 너무 뻔하니까 음, 그래, 시골에서 맘스터치를 발견한 사람처럼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어.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웨이브 컬을 넣은 한 여자분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어. 한국어로 말이야! 흰색 블라우스에 검정 슬랙스를 입은 깔끔한 차림이었는데 딱 봐도 회사원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 본능적으로 이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내 모든 신경을 귀에 집중해 대화 소리를 듣기 시작했어. 사정이 생겨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미팅 시간을 좀 늦춰야 할 것 같다, 담당자분께 잘 좀 말씀해달라, 그런 내용이었어.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말투였어. 마침내 여자분은 통화를 마쳤고 나는 다가가기로 결심했어. 그때 왜 그리 심장이 떨리던지.

  “혹시…… 한국분이신가요?”

  여자분은 서류 뭉치를 훑어보고 있다가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어.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몇 초간 바라봤고 그러다 “네, 그런데요?”하고 말했어. 차가운 말투였고 나는 바짝 쫄았지. 하지만 내게 도움을 줄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다는 간절한 마음에 물러설 수 없었어. 나는 우선 고개를 숙이고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하다 말했고 고개를 들고 내 사정을 말하기 시작했어. 대학생인데 혼자 돈 모아 홍콩으로 여행을 왔다, 재밌게 놀고 즐기다 집에 돌아가려고 하는데 이런 일이 생겼다, 항의하고 싶은데 내가 영어를 못해서 뭐라 할 수가 없다. 여자분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었어. 이야기가 끝나고 몇 초를 더 그렇게 있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어. 들고 있던 서류를 옆구리에 끼고 나를 바라봤어.

  “잠깐 나 좀 따라올래요?”

  우리는 카운터로 갔어. 아까 그 직원이 있었고 여자분이 아주 유창한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어. 직원은 아까 단호한 모습과는 다르게 당황한 표정이었어. 얼마간의 대화 끝에 직원이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하더니 어디론가 갔어. 잠시 뒤 정장을 입은 남자 한 명을 데리고 왔어. 좀 더 높은 직급의 사람이었나 봐. 그 남자와 여자분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어. 여자분은 시종일관 심각한 표정으로 단호히 말했고 남자는 점점 당황해하는 기색이 보였지. 분명 사이다 같은 대화였을 건데 내가 알아듣지를 못해서 여기 옮길 수 없다는 게 참 아쉬워. 오 분이 넘도록 이어진 대화 끝에 어떤 결과가 나온 것 같았고 여자분이 나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어.

  “회사 규정에 따른 거라 자기도 권한이 없대요. 하지만 자기네가 잘못한 거니 다음 비행기를 직원가에 할인해서 구매할 수 있다고 하는데 어때요?”

  물론 아까보다는 나아진 상황이었지만 근본적인 건 변화가 없었어. 왜냐면 돈이 없었으니까.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어물거리고만 있었어. 그러다 여자분이 “6시 20분 비행기가 제일 빠른데 괜찮죠?”하고 말했어. 내가 “네?”하고 말했고 여자분은 고개를 돌리더니 직원에게 무어라 말하면서 카드를 건넸어. 잠시 뒤 직원이 여자분에게 무언갈 건네줬고 여자분이 다시 내게 그것을 건네줬어. 바로 비행기표였어. 나는 얼떨결에 그걸 받아 들었어.

  솔직히 말해 여자분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이런 상상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어. 그런데 막상 실제로 일어나니 어찌할 바를 몰랐어. 그런 상상을 했다는 게, 그런 기대를 했다는 게 부끄러워졌어. 그와 동시에 이제 살았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더 부끄러워졌어.

  “아……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걸 바란 건 전혀 아니었는데 그냥 저 혼자 너무 막막해서…… 근데 갑자기 한국어가 들려서 너무 반가워가지고…… 죄송해요. 제가 한국에 도착하면 꼭 돌려드릴게요. 진짜 이러려고 부탁드린 게 아닌데…… 죄송해요. 어, 그리고……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데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횡설수설했어. 가만 보면 그때 나는 한국어도 참 못한 것 같아. 내가 당황해하는 모습이 귀여웠는지 여자분이 웃었어. 나에게 밥은 먹었느냐고 물었고 나는 배가 고팠지만 왠지 그렇게 말하면 또 폐를 끼칠 것 같아서 방금 먹었다고 말했어. 우리는 다시 로비로 갔어. 그리고 대화를 나눴지.

  아까 엿들은 대화로 나는 여자분도 내가 타려 했던 비행기를 놓쳤으리라 추측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택시를 타고 공항에 오다 경미한 교통사고가 났고 그것 때문에 비행기를 놓친 거였어. 목적지도 전혀 다른 곳이었지. (그게 어디였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이 나지 않아.) 여자분은 한국의 한 맥주회사 해외영업팀에서 근무하고 있었어. 지금 가려는 지역에 현지화한 맥주를 생산하기 위해 그곳 유통기업과 미팅을 하러 가던 중이었지. 여자분은 내게 홍콩 여행은 재밌었느냐고 물었고 나는 여행했을 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마구 떠들었어. 디즈니랜드에 갔는데 생각보다 별 게 없어서 실망했던 일, 길거리 시장에서 이것저것 둘러보다 소매치기를 당할 뻔한 일, 비싼 숙박비를 지불한 호텔에서 밤에 창밖으로 펼쳐진 스카이라인의 야경을 보고 황홀함에 취했던 일. 여자분은 마치 자기 이야기인 것처럼 집중해서 들어줬고 맞장구를 쳐줬어.

  “여자 혼자서 여행하기가 무서웠을 텐데, 대단하시네요.”

  여자분이 말했어. 나는 당신도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부끄러워서 참았어. 지금 생각해보면 여자분이 내게 맞춰줬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 첫 여행이었기에 몹시 들떠있었던 반면 여자분은 해외 출장으로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다녀서 덤덤해졌을 텐데.

  그렇게 대화하다 여자분이 이제 자기는 탑승수속을 하러 가야 한다고 말했어. 나는 한국에 도착하면 돈을 갚겠다고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말했고 여자분은 극구 사양했어. 나는 계속 알려달라고 졸랐어. 여자분은 졌다는 듯 번호를 불러줬고 나는 핸드폰에 받아적었어. 여자분은 무사히 잘 한국에 도착하기를 바란다고 말했어. 나는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말했어. 그렇게 여자분은 수속장으로 들어갔고 이내 게이트 안으로 사라졌지.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어.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어. 그런데 웬걸,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라는 음성이 나오는 거야. 어떻게 된 거지 하고 몇 번을 더 걸어봤지만 마찬가지였어. 둘 중 하나였지. 여자분이 일부러 다른 번호를 알려줬거나 아님 내가 잘못 받아적었거나. 전자면 다행이었지만 후자면 어쩌나 너무 난감했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번호를 똑똑히 적었고 다 적고 확인까지 받은 기억이 떠올랐어.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지. 정말 내가 돈을 보낼까 봐, 그리고 그게 아직 학생인 나에게, 혼자 돈을 벌어 여행 다니는 나에게 부담이 될까 봐 일부러 그러신 거겠지.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어. 그리고 왠지 모르게 서운한 마음도 들었어. 근데 가만 보면 난 그분의 이름을 물어볼 생각도 못했어.

   뒤로 여러 나라를 다니며 공항에  때마다 그때 일이 떠오르곤 했어. 그리고 생각했지. 이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은 서로에게 어떤 인상과 기억을 남길까? 대부분 지나면 바로 휘발되는 인상일 테고 그보다   오래 머무는 인상도 있을 테고 어쩌면 기억이 되는 인상도 있겠지. 그리고  기억의 시간도 제각각이겠지.

  그 여자분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제 기억이 나지 않아. 실제로 보면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확신할 수는 없어. 어쩌면 우리는 한국에 어느 거리를 걷다가 스쳤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제 만날 수는 없을 거야.

  나는 가끔 그것에 대해 생각해. 한 사람이 우연히 다른 사람을 만나 기억을 형성한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 기억을 끝으로 더는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오랜 시간 그 기억을 가진 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여기엔 어떤 신기함이 있는 것 같아. 어떤 이상함이 있고, 어떤 슬픔이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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