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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궤도이탈 Apr 17. 2022

22. 저주인형 (2)

  그러다 떠오른 게 생리였어. 그 사람이 유독 신경질적이고 별 거 아닌 거에도 트집 잡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속으로 ‘생리 터졌나 보다’ 했지. 이런 경험이 몇 번 쌓이다 보니까 출근할 때 표정만 봐도 ‘아, 이 사람 지금 기분 안 좋구나’하는 걸 알 수 있었지. 나보고는 감정적으로 대한다 어쩐다 뭐라 했으면서 진짜 내로남불 아냐?

  나는 계획을 세웠어. 부적을 갖고 다닌다. 그 사람이 유독 신경질적으로 구는 날을 고른다. 그 사람이 화장실에 가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따라간다. 그 사람이 나오면 안으로 들어가 휴지통을 뒤진다. 버려진 생리대를 발견한다. 부적에 피를 묻힌다. 끝.

  계획을 세워놓고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어. 고작 인터넷에서 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사놓고는 너무 요란을 떠는 게 아닌가. 근데 아까도 말했듯이 그때의 나에겐 스트레스를 해소할 무언가가 필요했어. 오히려 이렇게까지 하면서 ‘의식’을 치르면 정말 무슨 효과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들었어. 그날 이후로 핸드백에 부적을 넣고 다니며 기회를 노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이 벌어졌어. 출근하니까 그 사람이 없길래 무슨 일인가 봤더니 몸이 안 좋아서 오전 반차를 썼다 하더라고. 순간적으로 ‘그때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 저번 달 이맘때쯤 나를 크게 갈궜던 기억이 떠올랐고 그래서 생리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지. 그 사람이 나한테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생리 주기까지 파악하다니 이거 참 웃기면서도 슬픈 일 아냐?

  밖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그 사람이 자리에 앉아있었어. 약간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떨군 게 뒷모습만 봐도 상태가 별로 안 좋다는 걸 알 수 있었지. 기분이 안 좋은지 아는 척도 안 하더라고. 나도 별말 없이 자리에 앉았어. 근데 잠시 뒤 그 사람이 나를 부르더라고. 선배가 왔는데 아는 척도 안 한다면서. 몸이 안 좋아보여서 말을 안 걸었다 하니까 그건 변명이라고 몸이 안 좋으면 괜찮냐고 물어보는 게 예의 아니냐고 하더라. 진짜 꼰대도 이런 꼰대가 없어. 나는 죄송하다 말했고 그 사람은 귀찮다는 듯 가라는 손짓을 했어. 나는 자리로 돌아왔고 그 사람을 틈틈이 지켜보며 때를 노렸어.

  얼마 뒤 그 사람이 핸드백 속에서 무언가를 챙기고 화장실로 가는 게 보였어. 나도 핸드백 속에서 부적을 꺼내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지. 화장실 변기는 네 칸 중 한 칸만 잠겨있었고 나는 그 옆 칸으로 들어갔어. 잠시 뒤 옆 칸에서 누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고 손 씻는 소리와 나가는 소리가 들렸어. 나는 나와서 옆 칸으로 들어갔고 쓰레기통을 뒤졌어. 그리고 버려진 생리대를 발견했지. 나는 생리대에 범벅된 피를 부적에 묻혔어. 부적을 흔들어 말린 다음 다시 주머니에 넣고 자리로 돌아왔지.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부적을 책상 위에 올려놨어. 그다음 깨끗하게 소독한 바늘로 검지 손가락을 찔렀어. 피가 흘렀고 나는 그것을 부적에 묻혔어. 이제 저주를 당하는 자와 의식을 거행하는 자의 피를 모두 묻힌 거였지. 인형과 못을 가져왔고 인형 위에 부적을 올려놨어. 이상하게 떨리더라. 호흡을 한번 내뱉고 나는 못을 찔러 넣었어. 이로써 의식이 모두 끝난 거였어. 이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지. 설명서를 봤지만 그다음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어. 이렇게 끝난 건가? 이대로 그냥 두기만 하면 되는 건가? 나는 생각했지.

  그 뒤 며칠 동안 그 사람을 지켜봤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어. 여전히 윗사람한테는 굽실거리고 아랫사람한테는 까칠하게 대했지. 역시 그냥 장난일 뿐인데. 내가 뭘 기대한 건지. 나 스스로가 바보 같다고 느꼈어. 그러다 예전 공포 이야기 같은 데서 저주인형에 해코지를 하는 장면이 떠올랐어. 막 바늘로 찌르고 하면서. 내가 아무 짓도 안 해서 아무 일도 안 생기는 걸까 생각했고 집에 가서 테스트를 해보기로 마음먹었지. 그날 집에 돌아와 나는 인형의 목 부분을 바늘로 콕콕 찔렀어. 무슨 일이 벌어지기를 바랐고, 한편으로는 진짜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어쩌나 우려스러웠어.

  다음 날 출근했는데 웬일로 그 사람이 자리에 없더라. 출근 시간이 거의 다 돼서야 도착했는데 오면서부터 기침을 해대는 게 감기에 걸린 것 같았어. 저번에 괜찮냐고 안 물어봤다고 뭐라 한 게 떠올라서 그 사람한테 가서 혹시 몸 안 좋냐고 물었지. 근데 인상을 쓰면서 손가락으로 목을 가리키더니 팔로 X 자를 만들더라. 순간 소름이 돋았어. 나는 자리로 돌아왔고 그 사람은 계속 기침을 해댔지. 곧 차장님이 그 사람한테 가서 혹시 코로나일지 모르니 검사 한 번 받아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했고 그 사람은 여전히 말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고 퇴근했어. 그리고 확진 판정을 받았지.

  무척이나 심란했어. 나 때문이 아닐까? 그냥 우연일까? 지금은 좀 기세가 죽긴 했지만 그때는 코로나가 한창이었으니까. 하지만 우연이라기엔 너무 절묘한 것 같았어. 어떻게 인형에 목을 찌르자마자 그런 일이 생길까? 근데 생각해 보면 코로나는 잠복기를 거친 뒤 증상이 나오니 내가 인형에 목을 찌르기 전부터 바이러스는 그 사람 몸 안에 있다는 말이 됐어. 역시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미신을 믿고 있는 건가 스스로 우스워졌어. 고작 인형일 뿐인데 내가 뭐 하는 거지?

  그 사람은 열흘 동안 재택근무를 했어. 완전히 차단된 건 아니었지만 같은 공간에라도 없으니까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라. 돌아와서도 한동안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잔기침도 계속 해대는데 불쌍하면서도 쌤통이었지. 그러면서도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어. 내가 인형에 가했던 저주는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걸까? 단지 우연이었을 뿐일까?

  한편으로는 궁금증도 들었어. 인형이 저주의 힘을 가졌는지 아닌지에 대한. 전혀 개연성 없는 상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모르게 인형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드는 거야. 고민 끝에 나는 실험을 해보기로 했어. 인형에 다시 한번 해를 가하기로 한 거지. 이번에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면 그냥 나 혼자 이상한 상상을 한 것에 불과했고 만약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볼 일이었지.

  집에 돌아와 나는 인형을 탁자 위에 올려놨어. 이번엔 어디에 해를 줘볼까 인형을 바라봤지. 다시 한번 목? 목은 저번에 했으니까 이번엔 머리? 아니면 팔이나 다리? 고민을 하는데 순간 내가 낯설게 느껴지더라. 그러다 생각했어. 아니야, 이건 그 사람이랑 아무런 상관이 없을 거야. 단지 내 안의 궁금증을 해소시키기 위해 이러는 거야. 그리고 만약 그 사람한테 진짜 무슨 일이 생긴다 할지라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 사람이 나한테 한 거에 비하면 약과야.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안해졌어. 고민 끝에 나는 인형의 오른쪽 다리를 바늘로 찔렀어.

  그리고 무슨 일이 생겼는 줄 알아? 이틀쯤 지났을 때였나. 그 사람은 탕비실로 가려고 계단을 내려가던 중 발을 헛디뎌 넘어졌고 오른쪽 발목에 금이 갔어. 계단에서 비명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놀라 나가 보니 그 사람이 바닥에 넘어져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대원이 도착해 그 사람을 들것에 싣고 나갔어. 그 모습을 보며 부장님이 혼잣말로 중얼거렸어. “쯧쯔, 이 대리가 액운이 들었나. 안 좋은 일이 자꾸 생기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멀찌감치 지켜봤어. 마음속에 온갖 것이 요동치고 있었지.

  그날 집에 돌아와 다시 인형을 마주했어. 인터넷에 산 배송비 포함해 만 원도 안 되는 인형이 무섭게 느껴졌어. 나는 설명서를 펼쳐 들었어. ‘주의! 이 인형은 강력한 저주의 힘을 가진 인형입니다. 한번 의식을 거행하면 돌이킬 수 없으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 사용하십시오.’ 처음엔 우습게 넘겼던 그 문구를 다시 읽어보니 소름이 돋았어. 인형을 계속 두다간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불안했고 어쩌면 나에게까지 피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인형을 버려야겠다고 결심했지. 근데 버리는 걸로 끝이 날까? 이런 걸 그냥 버려도 되는 걸까?

  나는 인형을 샀던 곳에 전화를 걸기로 했어. 어떻게 하면 저주를 끝낼 수 있을지 알고 싶었어. 사이트에 접속해보니 고객센터 번호가 있었고 그곳에 전화를 걸었지. 몇 번의 신호음 끝에 한 여자가 전화를 받았어. 흔히 볼 수 있는 고객상담원의 말투였지. 나는 안심하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어. 그리고 어떻게 저주를 끝낼 수 있냐고 물었어.

  “네, 고객님. 저주가 실현돼서 놀라셨군요. 고객님처럼 놀라신 분들이 저희 쪽에 자주 전화를 주시곤 하는데요. 의식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뿐입니다.” 그 여자가 말했어. “저주를 당하는 사람이 죽거나 의식을 거행하는 사람이 죽는 경우에만 의식을 끝낼 수 있습니다, 고객님.”

  “네? 뭐라고요?”

  “잘 못 들으신 거 같아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저주가 끝납니다, 고객님.”

  “지금 장난해요? 인터넷으로 이상한 인형 팔아놓고 누가 죽긴 뭘 죽어?”

  “네, 고객님. 이런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 저희가 설명서를 같이 보내드리는데요. 읽어보시면 의식을 거행하기 전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고 쓰여있습니다.”

  그 여자가 말했고 공손하지만 왠지 기분 나쁜 말투에 말이 나오지 않았어. 잠시 뒤 그 여자가 다시 말했지.

  “다들 무척이나 가벼운 마음으로 저희 상품을 구매하시곤 합니다, 고객님. 그냥 영화나 소설에서 나온 인형을 본뜬 것에 불과할 거라고요. 놀이나 장난이라 생각하시는 거죠.”

  “누가 저주 같은 게 실제로 일어나리라고 생각하겠어요? 다들 그냥 재미로 사는 거지.”

  “순진하시군요, 고객님. 세상에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뭐? 지금 장난해요? 아무튼 빨리 저주를 끝낼 수 있는 방법이나 말해요.”

  “네, 고객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둘 중 하나가 죽는 방법 말곤 없습니다.”

  “아니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의식이든 저주든 그딴 거 안 믿어.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면 그만이야.”

  “네, 고객님. 인형을 버리는 건 고객님의 자유지만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말씀드리면, 저주가 끝나지 않은 이상 인형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저주를 당한 사람한테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당신들 경찰에 신고할 거야. 이상한 인형 판다고.”

  “네, 고객님. 실제로 예전에 저희를 신고하신 분이 몇몇 계신대요. 하지만 사건의 인과성을 입증하지 못해 저희 쪽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역으로 신고하신 고객님이 피해를 받아 정신병원에 입원하신 경우도 있습니다, 고객님.”

  나는 기분이 나쁘다 못해 섬뜩해졌고 전화를 끊었어. 인형은 탁자 위에 누워있었고 뭔가 나를 응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 눈이 없었는데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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