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하 Nov 01. 2017

우윳빛 믿음

신뢰와 헛됨이 공존하는 순간이 있다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기에 믿는 일들이 있다. 진짜 믿고 싶어서 믿는다기 보다는, 그와 관련된 다른 것들을 잃고 싶지 않아서 믿는 것. 우리는 그걸 잃지 못해서 붙잡고 있는 것.이라고 칭하고, 더 쉽게는 '미련'이라고 부른다.


미련이 남는 일들은 항상 뒤꽁무니가 길다. 어디를 가든 긴 꼬리가 나보다 항상 늦게 도착한다. 그리고 그 꼬리는 내가 향하고 있는 곳이 아닌 항상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다시 어딘가로 움직이려면 그 꽁무니를 들고 방향을 틀어야 한다. 미련이 갖는 속성이다.


미련의 기본값은 내 곁에 없는 것에 대한 믿음인 동시에 내 곁에 있는 것에 대한 불확신이다. 세상은 A와 B가 각각 존재하는 이분법적인 세계가 아니라서, A와 B가 동시에 존재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관계에 있거나, A를 얻고 나서야 B를 얻을 수 있는 선후관계에서 우리는 헷갈릴 수 있는 것이다. A와 B를 얻기 위해서 C를 포기하기도 하고, D를 미루기도 하며, E와 F를 외면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소망하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와 함께 앞이 보이지 않는 신뢰에 대한 '헛됨'을 동시에 느끼며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내가 소망하는 것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소망하는 것을 얻기 위해 불투명함을 끝없이 헤쳐야 하는 헛된 감정이란. 


누군가는 미련의 대상에 대해서 갖는 우윳빛처럼 불투명한 믿음을 반쪽짜리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쪽만을 믿는 것이 과연 진짜 신뢰라고 할 수 있는지, 진짜 신뢰라면 신뢰의 상대나 대상에게 온전히 나를 맡겨야 하는 것이 아닌지,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군가에게 우윳빛 믿음이 무엇이 이상한가? 나는 되묻고 싶다. 살면서 어떤 것에 대해서 백 퍼센트 확신이 드는 일이 얼마나 있었나? 오히려 백 퍼센트 확신이 들었다고 생각했던 그 일이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었나. 투명한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믿기 이전에 온전히 투명한 것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지, 라는 의문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세상에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불확실함을 끌어안고서 누군가에게, 또는 어떤 대상에게 신뢰를 부여한다. 누군가가 어떤 것을 믿는 이유는 그가 그것을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뢰의 이유에는 믿음 외에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미련과 미련으로부터 나오는 헛됨의 감정은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뢰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에 붙잡힐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미련에 붙잡혀서 신뢰와 헛됨의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고 해도 다른 누군가가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윳빛 믿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설된 상황이 꼭 표면적으로 보이는 단어의 모순이 아니라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역설임을. 불투명 속에서 포기한 것에 대한 미련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누구나 그렇기에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픔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가 나를 그것을 근거로 판단할 수도 없다는 것을.


신뢰와 헛됨이 공존할 수 있다는 말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어도 괜찮다는 소리가 아니다. 생강 꽃이 말하는 우윳빛 믿음은 반쪽짜리 신뢰가 아니라, 신뢰하기로 결정한 것 대신 포기한 것에 대한 미련의 감정을 누구나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특정 누군가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느껴지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감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윳빛 신뢰는 가장 흔하지만 당연하고도 이유 있는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금까지 고생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