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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너머의 과정을 향해서

by 이정하

학생들이 진리를 알아야 한다면, 그리고 학교에서 진리를 배울 수 있다면, 학교에서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진리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저번 과제 때 얻은 결론은 ‘절대불변의 진리는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절대불변’ 이라는 말이 주는 한계가 ‘진리’의 속성이라는 것이 우리 팀의 주장이었지만, 그만큼 진리는 어느 시공에서나 동일하고 변하지 않지 않기 때문에 찾기가 어렵다. 우리는 진리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을 때,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워야 할 내용들에 대해서 다시 고민해볼 수 있다. 교육이, 학교의 교사가 진리에 대해서 알 수 없을 때, 학교의 학생은 어떤 것을 학교에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어떤 현상계의 진리를 끝까지 쫓아가 답을 얻는 것이 교육의 목적인지, 아니면 현상계의 진리를 향해 스스로 탐구하는 과정을 거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인지 말이다.


우리는 절대불변의 진리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으므로, 학생들은 현 시대 학교에서 절대불변의 진리를 얻을 수 없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렇다면 교사는, 그리고 학교는 무엇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가? 나는 학교에서의 교육이 학생들에게 진리를 알려주지 못하는 대신에, 진리에 가까운 모습을 향해 학생 스스로 탐독할 수 있는 자세를 가르쳐야 한다고 믿는다. 사실,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현문우답(賢問愚答)’이 될 수 있다. 질문 자체는 ‘절대불변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면, 학교는 학생들에게 어떤 것을 가르쳐야 하는가?’ 이었다면,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특정한 어떤 정답이나 진리가 아닌 그것을 찾으려는 과정에 스스로 이르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정답을 찾기보다 스스로 정답에 가까운 것에 도달하는 과정, 즉 ‘정반합(正反合)’의 과정에 더 중요성을 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나의 주장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가르칠 진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진리, 또는 그 진리에 가까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한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불변의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또한, 진리에 가까운 무언가를 향해서 끊임없이 탐독하는 과정이 진리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진리에 대한 탐구과정은 결과를 알 수 없고, 진리를 얻어내는 것이 결과가 아닌, 학생 개개인이 진리에 가까운 모습을 향해 탐독하는 과정만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지혜로운 자가 결과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 과연 정말 그런가? 라는 의문을 품고 반박하고, 다시 논박하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진리에 이르는 과정을 생성하는 것일 것이다. 이 과정을 우리는 앞서 말한 ‘정반합(正反合)’의 과정이라고 부른다. 진리를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지혜로운 자는 자만하지 않고 자신이 정말 진리를 깨달았는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주장을 버려가며 탐구하고,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자는 스스로 진리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탐구과정을 거듭하며 노력할 것이다. 나는 그 탐구과정 전체를 자신이 세운 답을 새로운 근거와 이유로 무너뜨리고, 새로운 답을 제시하고, 다시 무너뜨리는 것을 반복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 신전의 문구를 주장했다. 나는 이 문구가 자신의 처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과정을 거듭해야 한다는 말로 느꼈다. 우리는 무언가를 배우고, 수업을 듣고 나서 쉽게 어떤 내용을 ‘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앎’이 사실은 어떤 것을 잘 모르는 것에 가까운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더 이상 알지 않으려고 하거나 더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는데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바로 학교에서의 학생에게 필요한 진리를 향한 탐구과정이며, 교사는 학생이 ‘무지(無知)’에서 ‘지(知)’라는 상태로 나아갈 때, 그 아는 상태를 과감하게 과연 학생이 학교에서 배우고 얻은 내용이 정말 다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생각을 가지게끔 이끌어주어야 한다. ‘무지(無知)’에서 ‘지(知)’라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 ‘지(知)’가 진실로 ‘지(知)’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교사는 학생에게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다. 학생이 어떤 것에 대해서 자신이 완벽하게 안다고 생각하는 상태에서는 진실된 탐구과정을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학생 자신이 완벽하게 알지 못함을 자각하고, 진리에 가까운 상태를 향해 탐구하는 과정에서 학교에서의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해진 교과과정 내에서 교과 이외의 것을 탐구하거나 교과서에 나와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내용을 탐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정한 어떤 ‘것’, 즉 정답이 아닌 탐구과정에 학생 스스로 이르도록 하는 것은 현 교육과정과 현실적인 한계로 인해 잘 이루어지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절대불변의 진리를 알 수 없어도 그것에 가까운 무언가를 향해 가는 과정 속에서 학생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학교 교육과정에서 ‘답’으로 대변되는 진리가 무엇인지 찾기 보다는 그 진리를 찾는 과정에 학생 본인이 탐구를 하게 된다면, 학교에서의 교육이 지향해야 할 목표는 학생들이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정답을 잘 찍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그 대신 시험과는 별개로 학생들이 교과서와 교과목을 벗어나더라도 탐구과정을 교사가 응원하며, 과정 속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필요해질 것이다. 그에 따라 학교에서의 교육이 지향하는 목표는 정답 또는 결과 중심적이 아닌 과정 중심적이게 된다. 그 노력은 진리, 또는 진리에 가까운 것을 향하고, 진리에 스스로 가까워지려는 노력이지만, 진리를 얻으려고 하는 노력이 아닌 학생들 스스로 내실을 갖추고, 강해지려고 하는 노력이다. 학생들이 비로소 아는 것에 대한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어떤 것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모르고 있었던 자기 자신을 알 때,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하고, 끝없이 탐구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내가 주장하는 학교에서의 교육은 ‘무지(無知)’, 즉 모르는 것이 부끄러움이 되지 않는 교육이다. 학생이 모르는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그것을 바꾸려고 할 때, 모르는 상태를 아는 상태(知)가 되며, 다시 새로운 지식으로 그 상태를 채우려고 하는 과정 속에서 ‘무지(無知)’에서 ‘지(知)’라는 상태로 도달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내 주장은 그러한 정반합(正反合)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학생이 스스로 자신의 것을 버리고, 다시 채우고, 다시 버리고, 채우는 훈련을 거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학교에서의 교육이 가져야 할 본질이라는 주장이다. 정답과 진리라고 불리는 것을 답습하는 것이 아닌, ‘과연 진짜 그러할까?’라는 의문에서 새롭게 탐구하는 과정이 있는 학교에서의 교육만이 학교와 교육 전체, 그리고 사회에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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