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

죄가 주는 착각

by 인생질문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

아름다운 노랫말과 선율로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주는 노래가 있다. <마법의 성>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언제나 너를 향한 몸짓엔 수많은 어려움뿐이지만, 그러나 언제나 굳은 다짐뿐이죠, 다시 너를 구하고 말 거라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죠, 끝없는 용기와 지혜 달라고,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멀리 그대가 보여, 이제 나의 손을 잡아보아요, 우리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죠,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 우리 앞에 펼쳐질 세상이 너무나 소중해, 함께라면.


꿈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처럼 그래서 마음은 굴뚝같아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꿈속에서 만난 공주를 구하고야 말겠다는 노랫말 주인공의 간절함은 후렴구에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라는 고백으로 완성된다. 그 장면을 상상해보면 이제 감동받을 나이는 지난 것 같은데도 여전히 잔잔한 감동이 몰려온다.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오르는 공주의 모습이'


만일 노랫말의 주인공이 공주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 창살에 갇아버리고 손안에 인형처럼 사로잡아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모습이 아니라 노랫말 주인공 곁에 묶어 놨다면 이 노래는 사랑의 고백에서 한순간에 호러물로 바뀌고 말 것 이다.


죄가 주는 사랑에 대한 왜곡이 있다. 사단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랑에 대한 가치를 결코 훼손할 수 없기에 사랑을 무너뜨리지 않고 죄로 타락한 우리로 하여금 사랑에 대해 왜곡, 삐뚫어진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가장 왜곡된 삐뚫어짐이 뭔가? 집착이다. 소유다. 그리고 종속되는 것이다. 죄는 그것이 사랑이라 착각하게 만든다. '사랑하면 모든 걸 같이 해야지. 사랑하면 나부터 챙겨야지. 사랑하면 내가 제일 먼저가 되어야지.'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집착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사랑은 바라봄이다. 온전한 그리고 여유로운 기다림이며 애틋함이다. 그리고 이 모든 온전한 사랑의 출발점에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 '자유함' 즉 노랫말로 풀어 말하면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오르는 모습'이 있다. 그러므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면 사랑하는 대상의 자유로움이 곧 사랑의 감격으로 되돌아 오는 것을 날마다 경험한다. 예를 들면 이런 말이다.


사랑하는 아들이 넓은 잔디밭을 뛰고 있다. 뛰면서 나무도 보고 풀도 보고 때론 벌레를 보고 소리치고 무서워하기도 하고 그러나 아들은 여전히 힘차게 잔디밭을 거닐며 뛰고 넘어지고 울고 웃고 달린다. 왜? 자신의 뒤에서 아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향하면 어김없이 자신의 눈과 마주하는 아버지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가 보고 있는 확신안에 '자유함'을 얻는다. 그 시선 안에 시공간을 초월한 아버지의 사랑이 자녀로 하여금 온전한 '자유함'을 누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버지 곁에 아들은 없다. 아들은 어느샌가 저 멀리 뛰어다녀 어느때는 잘 보이지도 않는 듯 하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곁에 아들이 있지 않는다고 아버지는 외롭지 않다. 슬프지 않다. 자신과 함께 조잘거리며 얘기하지 않는다고 삐지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아들이 누리는 그 '자유함'은 아들을 향한 애틋한 아버지, 자신의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아버지는 알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랑

만일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잔디밭을 뛰어놀지 못한다면, 만일 아들이 아버지가 외로울 것 같아 잔디밭으로 뛰어나가지 않는다면 자식을 가진 모든 부모는 공감할 것이다. '내 아이에게 문제가 있나? 도대체 어떤 불안이 이 아이로 하여금 이런 결박을 만들게 되었을까?' 고민하고 아파할 것이다. 또한 만일 아버지가 아들이 곁에 있어야 만족과 사랑을 얻을 수 있어 아들을 자신의 몸에 묶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아버지 그리고 아들을 철저하게 죽이는 가장 완벽한 사단의 저주가 될 것이다.


자유함이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이다. 때론 말이 원하는대로 주고 받지 않아도 혹 몇개월 수년간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랑안에서 관계로 맺어진 인연은 온전한 자유함 안에서 서로를 채우는 존재가 된다. 나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 상대방이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 그 모습 그대로로 인해 사랑하고 자유하며 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함이다. 아들이 아빠에게 아빠가 아들에게 사랑하기에 적극적인 자유를 허용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자유함을 선물 혹은 요구하시는 것이 아닐까?


죄가 말하는 완벽한 사랑은 무엇인가? 내가 채우는 것이다. 그러니 내 곁에 있어야 한다. 왜 수많은 이단들이 공동체로 집단으로 가스라이팅으로 존재하는가? 죄의 탁월한 거짓, 그것이 사랑이고 진리라고 속이기 때문이다. 파괴적 인간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공동점을 보라. 결국 사랑에 대한 착각 혹은 오만함으로 상대방을 소유하는 것이다. 자녀의 삶을 파괴하는 부모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사랑이라는 이유로 자녀를 자신의 몸둥아리에 묶어 두기 때문 아니던가?


예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묶으시고 결박하지 않으셨다. 아니 오히려 스스로 결박을 당하심으로 죄를 해결하시고 그동안 죄의 노예로 결박되어 사랑의 착각안에서 사랑하면 할 수록 고통이 깊어지는 우리에게 온전한 진정한 '자유함'을 허락하셨다. 넓은 잔디밭을 뛰어놀게 하시며 인생의 모든 희노애락 속에서 언제든 시선을 맞추시는 그 자리에 여전히 계심으로 우리를 향한 '자유함'을 완성하셨다.


사랑은 자유함이다

집착과 사랑의 구별은 단순하다. 사랑은 오래참고 .... (모두 아는 그 말씀). 결국 사랑은 상대방이 하나님안에 자유함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과 그 사이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소유하지 않으려하고 내가 해결해주지 않으려 날마다 죄가 충동질하는 사랑의 착각을 성령의 지혜로 이겨내는 것이다.


집착은 뭘까?하나님과 그 사이에 개입하면 그건 모조리 집착이다. 부모가 하나님과 자녀 사이에 개입하거나 (헬리콥터맘) 스승이 제자와 하나님 사이에 개입하거나 (가스라이팅) 친구가 하나님과 친구 사이에 개입하는 것(서로 종속된 존재)은 결국 죄가 가장 좋아하는 사랑의 왜곡된 결과물이다.


결론,

온전한 사랑으로 인한 자유함은 결국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온전한 사랑의 관계로 이어져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온전한 사랑이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사랑도 아름답게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집착하면 파괴적 삶이 된다. 어쩔 수 없다. 무서운 것은 사랑으로 포장된 집착은 꽤 멋지게 스스로를 속이고 합리화시키는 가장 탁월한 사단의 도구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해주실 일이다. 자유함이 없이 집착의 사랑으로 자신과 세상을 파괴하는 불쌍한 우리 영혼을 향해 온전한 사랑을 부어주시지 않는다면 죄수 중에 괴수로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온전한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힘들다. 아프다. 어렵다.


교사이자, 목사로 학교에서 20년 가까이

가르치고 읽고 쓰고 듣고 살아갑니다

프로질문러, 인생질문 작가 유찬호

biblestorys@naver.com

https://linktr.ee/biblestor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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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머리 게으른 일상이지만 최선을 다해 답을 해보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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