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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프러리 Sep 12. 2024

송삼석 모나미 창업자

1928년 1월 19일 ~ 2022년 4월 1일

“하나님은 내게 153이라는 숫자를 통해 기업인이 일생을 통해 반드시 지켜야 할 상도를 일깨워 주셨다.” 모나미 창업주 고 송삼석 명예회장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모나미153 볼펜은 모나미의 오늘이 있게 해준 제품이다. 송삼석 명예회장은 1962년 5월 16일 경복궁에서 열린 서울 국제산업박람회에 참석했다. 2년 전 창업한 회화용 문구류 제조업체 광신화학공업의 대표 자격이었다. 광신화학공업은 모나미의 전신이다. 광신화학공업의 거래처 가운데 일본의 우치다 요코가 있었다. 우치다 요코는 지금도 일본 최대 사무용 가구 업체다. 우치다 요코의 직원도 서울 국제산업박람회에 참석했다. 송삼석 명예회장은 우치나 요코의 한 직원이 볼펜이라는 걸 꺼내서 필기하는 걸 처음 목격했다.


송삼석 명예회장은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다. 당시 한국에서 주로 쓰이는 필기구는 만년필이었다. 그것도 펜촉을 잉크병에 적셔서 써내려가는 방식이었다.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종이는 날카로운 펜촉에 찟겨져 빵구가 나버리기 일쑤였다. 서류에 잉크가 번지는 건 너무 흔한 일이었다. 송삼석 명예회장은 볼펜이라는 필기구에 반해버렸다. 한국에도 볼펜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삼양식품의 창업주 고 전중윤 명예회장이 일본 라면을 보고 국민 식량을 떠올렸던 것과 매한가지였다.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이 그랬던 것처럼 송삼석 모나미 명예회장도 볼펜 제조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 업체를 찾아갔다. 우치다 요코 직원이 사용했던 볼펜은 일본 볼펜 제조사 오토볼펜의 제품이었다. 송삼석 명예회장은 무작정 오토볼펜을 찾아갔다. 결국 오토볼펜으로부터 유성잉크 제조기술을 얻게 된다.


송삼석 명예회장은 가공할 추진력으로 불과 1년만에 볼펜 시제품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1963년 5월 1일 한국 최초 볼펜 출시를 앞둔 상황에서 송삼석 명예회장은 고민에 빠진다. 이름은 사내 공모를 통해 모나미로 정해졌다. 프랑스어로 내 친구라는 의미다. 프랑스 문학에 심취한 직원의 아이디어였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다. 모나미 뒤에 숫자를 붙이기로 했다. 어떤 숫자를 붙일 것이냐를 결정해야만 했다. 1963이나 501 같은 숫자가 아이디어로 떠올랐다. 모나미 볼펜이 탄생한 생년월일이었다. 그때 어떤 직원이 뜬금없이 153은 어떠냐고 제안했다. 알고보니 화투 용어였다. 153은 화투의 최고 숫자인 9를 만드는 숫자 조합 가운데 하나였다.


직원의 농담이었다. 송삼석 명예회장은 진담으로 받았다. 153의 다른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153은 요한복음 21장 11절에 나오는 숫자였다. 예수가 베드로를 통해 잡게 하신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였다. 153은 예수의 말씀을 따르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가르침을 상징하는 숫자였다. 그렇게 대한민국 최초 볼펜의 이름은 운명처럼 모나미153으로 정해졌다. 모나미153은 지금까지도 매월 300만 자루 이상 팔린다. 지난 반세기 동안 팔린 모나미153은 36억 자루다. 모나미153을 발판으로 모나미는 한국을 대표하는 1등 문구기업으로 성장했다. 모나미의 국내 문구 시장 점유율은 45%에 달한다. 해외 매출도 18%에 달한다. 153의 뜻이 이뤄진 셈이다.


송삼석 명예회장은 2022년 4월 1일 낮 12시 3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다. 송삼석 명예회장에게 1962년과 1963년까지 1년여의 기간은 모나미153 개발기는 충격이 도전으로 바뀌고 노력이 성취로 돌아오고 우연이 운명으로 바뀌는 시간이었다. 인생의 모든 시간은 소중하지만 인생의 어떤 시간은 특별하다. 누군가 가장 빛나는 시간이 있다. 도전하고 성취하고 운명이 이뤄지는 시간이다. 1세기 가까운 송삼석 명예회장의 외길 인생에선 모나미153을 개발하던 시간이 그랬다. 제로투원의 시간이었다. 페이팔 창업자 피터 틸은 창업이 이뤄지는 제로투원의 시간은 단 한 번 뿐이며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기업한테도 창업주한테도 가장 중요한 시간들이다.


모나미153은 모나미만 바꾼 게 아니라 세상을 바꿨다. 모나미153 볼펜의 탄생은 지식혁명의 도화선이었다. 더 많은 정보를 더 편리하게 필기로 기록해서 공유할 수 있게 됐다. 한국 사회의 정보량은 볼펜 같은 편리한 필기구의 등장과 함께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21세기 디지털 사회에서 스마트폰 터치스크린의 등장에 비견된다. 산업화에서 앞서나갔던 독일이나 일본에 스테틀러나 코쿠요 같은 전통 있는 문구 기업이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20세기 산업 사회에선 필기구는 사고의 효율성과 정보의 저장성을 높여주는 당대의 컴퓨터였다. 그렇게 모나미는 한국 문구류의 대명사가 됐다. 송삼석 명예회장은 볼펜왕으로 불리게 됐다.


송삼석 명예회장은 1997년 장남 송하경 회장에게 모나미 경영권을 물려주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난다. 시장의 최전선에 서 있는 최고경영자로서 숱한 고난을 넘고 넘은 뒤였다. 모나미의 위기는 1988년 88올림픽이었다. 외국 문구류에 시장이 개방되면서 모나미153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아졌다. 송삼석 명예회장은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모나미153의 인기가 시들해진 건 KS마크 기준에 맞추다 필기감이 나빠진 탓이었다. 외국 볼펜의 부드러운 필기감과 경쟁하려면 내유성을 높여야했다. KS마크 기준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송삼석 명예회장은 당시만 해도 품질보증서가 다름 없었던 KS마크를 과감하게 반납한다. 모나미153을 업그레이드하는데 성공한다.


송삼석 명예회장은 문구류 이외의 사업에는 곁눈질을 하지 않았다. 재벌화가 대세이던 시대에 고집스런 선택이었다.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나의 이력서〉라는 칼럼에서 송삼석 명예회장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기업은 정글의 법칙이 작용하는 경쟁구도에서 1등을 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다. 지난 50여년간 기업 활동을 하면서 나는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좌초한 기업을 수 없이 봐왔다.” 송삼석 명예회장이 남긴 자서전의 제목은 《내가 걸어온 외길 50년》이다.


위기에 강하고 외길을 걷는 송삼석 명예회장의 경영은 이젠 모나미의 DNA가 됐다. 2000년대 스마트폰 시대는 모나미한테 큰 위기였다. 볼펜을 대신할 손가락펜이 등장해버렸기 때문이다. 종이의 시대가 지나가면서 필기의 시대도 저물었다. 송하경 회장은 아버지 송삼석 명예회장의 가르침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모나미는 필기구를 재정의했다. 과거와 같은 지식정보 저장의 도구가 아니라 수집의 대상이고 선물의 품목이 됐다고 봤다. 모나미를 갖고 싶게 만드는 프리미엄화에 집중했다. 위기를 모나미 브랜드의 업그레이드 기회로 삼은 것이다. 동시에 고집스럽게 해답을 문구류 시장 안에서 찾아냈다. 2014년 1월엔 개장 2만원 짜리 모나미153 탄생 50주년 기념 한정판을 내놨다. 2014년 8월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에 맞춰서 153 피셔맨 에디션을 내놨다. 모나미는 지난 3월 29일 정기주총에서 화장품을 사업 목적에 추가했다. 화장품 중에서도 펜슬형 아이라이너와 아이브로우와 마스카라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다. 볼펜 컬러 잉크를 만드는 색조 배합 노하우와 볼펜 케이스를 만드는 플라스틱 주형 기술도 화장품 제조에 적용된다. 화장품을 필기류로 재정의한 셈이다.


스티브 잡스가 세상에 남긴 최고의 유산은 아이폰이 아니라 애플이라는 기업 그 자체다. 마찬가지로 송삼석 명예회장이 남긴 최고의 유산은 모나미153이 아니라 모나미라는 기업이다. 문구산업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야말로 모나미의 기업 정신이다. 송삼석 명예회장은 신의 곁으로 갔다. 세상에 모나미라는 내 친구를 남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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