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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프러리 Sep 12. 2024

이데이 노부유키 소니 전 CEO

1937년 11월 22일 ~ 2022년 6월 2일 

“선배들의 업적을 존경하지만 결코 참고하지 않겠습니다.” 이데이 노부유키 소니 사장은 1995년 4월 취임식에서 이렇게 잘라 말했다. 선배 사장들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답한 것이었다. 이데이 노부유키 전 소니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활약할 때 가장 일본적이지 않은 일본인 경영자로 평가 받았다. 취임 일성부터가 전혀 일본적이지 않았다. 혼네는 감춘 채 “선배들의 업적에 폐를 끼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다”면서 90도 인사를 하는 게 일본적이다. 신임 이데이 노부유키 사장은 달랐다. 선전포고를 했다. 과거의 소니와 자신의 소니는 전혀 다른 소니가 될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당시 이데이 노부유키 사장은 58세였다. 환갑을 앞둔 나이였지만 생각은 신입 사원처럼 젊었다. 


이데이 노부유키는 취임 직전 미국 현지 시찰을 다녀왔다. 이데이 노부유키는 소니 유럽 지사에서 10년 동안 근무했다. 와인 전문가로 유명한 유럽통이었다. 정작 1990년대 중반 이데이 노부유키 사장의 관심사는 온통 미국이었다. 소니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통합된 IT기업으로 변모시키는 게 비전이었다. 미국에 그런 회사가 딱 하나 있었다. 애플이었다. 당시 애플은 스티브 잡스를 내쫓은 뒤 몰락해가고 있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데이 노부유키 사장 예정자는 소니 이사회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소니는 애플을 인수해야만 합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애플이 너무 싸서 문제였다. 만약 이데이 노부유키의 비전이 실현됐다면 글로벌 IT역사의 흐름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데이 노부유키는 애플 인수와 상관 없이 소니의 소프트웨어 기업화에 집중했다. 소니는 1994년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기를 출시한 상태였다. 이데이 노부유키는 플레이스테이션의 잠재력을 알아봤다. 플레이스테이션의 가격은 낮추고 게임 타이틀 제작사들을 투자해서 게임 콘텐츠에서 돈을 버는 생태계 모델을 만들어냈다. 지금 애플의 팀 쿡 CEO가 만들어가고 있는 애플 경제권 전략과 일맥 상통한다. 팀 쿡은 애플은 아이폰이라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아이폰을 통해 이용하는 콘텐츠 서비스로 더 큰 돈을 버는 기업으로 진화시켰다. 애플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콘텐츠과 관련 산업 종사자를 다 더한 이른바 애플 경제권의 크기는 1조 달러로 추산된다. 당시 세계 정상급 IT기업의 리더였던 이데이 노부유키는 같은 큰 그림을 그렸다. 그렇지만 팀 쿡과 달리 이데이 노부유키의 전략은 플레이스테이션을 제외하면 현실이 되지 못했다. 


플레이스테이션이 날개 돗친 듯 팔려나가던 1997년 1월 《비즈니스 위크》는 이데이 노부유키를 세계 최고의 경영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했다. 2006년 4월 《비즈니스 위크》는 이데이 노부유키를 최악의 경영자로 뽑았다. 극과 극의 평가를 받은 것이다. 당시 이미 이데이 노부유키는 1년 전인 2005년 실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한 상태였다. 《비즈니스 위크》는 취임 초엔 최고라고 칭송했던 경영자를 퇴임 이후엔 최악이라고 부관참시해버렸다. 그럴만큼 이데이 노부유키의 CEO 임기 내내 소니는 최정상에 올랐다가 밑바닥까지 무너져버렸다. 경영자로서 이데이 노부유키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다. 


최고경영자로서 이데이 노부유키는 치명적인 실수는 소니의 사일로를 분쇄하지 못하고 오히려 강화시킨 것이다. 사일로는 타워 형태의 곡식 저장 창고를 말한다. 부서 이기주의를 뜻한다. 소니는 이데이 노부유키 이전에도 사일로가 강력한 조직이었다. 소니의 엔지니어들은 자신의 제품에만 집착했다. 회사 전체의 큰 그림에서 생각하고 협력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니가 실패한 게 베타였다. 소니는 마쓰시다와의 VCR 표준 전쟁에서 베타 방식을 고수하다 패배한다. 이때만 해도 일본 안에서의 경쟁이었다. 글로벌 무대에서 소니의 부서 이기주의는 치명적이었다. 그런데 이데이 노부유키는 소니의 사일로를 오히려 강화시켰다. 소니의 각 사업부를 경쟁시켰다. 소니는 막강한 제품 프로폴리오를 갖고 있었다. 1979년 출시된 워크맨은 역사적인 제품이었다. 컬러TV와 비디어 카메라와 게임기까지 가전 왕국이었다. 정작 소니의 사업부들은 안에서 싸우느라 바깥의 경쟁자한텐 무관심했다. 자체 기술 개발보다 외부 업체의 기술을 적당히 베껴서 단기 실적을 내는 데만 혈안이 됐다. 이데이 노부유키의 실수는 애플한텐 반면교사가 됐다. 애플은 시가총액 3조원이 넘는 거대 IT기업이 됐지만 여전히 기능별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사업부별로 조직을 유지했던 소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를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급기야 소니 안에선 신입 사원들을 하향 평준화해서 뽑는 일까지 벌어졌다. 자기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뛰어난 후배를 기존 구성원들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직의 사일로가 개인의 사일로까지 번진 셈이었다. 한때 소니를 지탱했던 뛰어난 엔지니어들은 하나 둘 소니를 떠나갔다. 조직의 두뇌가 유출되는 브레인 드레인이 일어난 것이다. 이데이 노부유키는 인재 유출을 방치했다. 


이데이 노부유키는 국제통답게 글로벌 IT트렌드의 큰 흐름을 읽을 줄 알았다. 이데이 노부유키는 소니 역사상 처음 선임된 인문계 출신 CEO였다. 이데이 노부유키는 와세다 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이데이 노부유키의 아버지도 와세대 대학교 교수였다. 이데이 노부유키의 전임자인 오가 노리오 소니 회장은 기술 지식 이외에도 국제적인 트렌드 감각을 지닌 수장이 필요하다고 봤다. 탁월한 통찰이었다. IT기업은 언제나 인문과 기술의 교차로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스티브 잡스가 했던 말이다. 이데이 노부유키도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플레이스테이션에 이어 소니 바이오 노트북도 대박을 터뜨렸다. 이데이 노부유키는 이른바 윈텔 진영과 손을 잡았다. 스티브 잡스가 복귀한 이후 부활하려는 애플에 맞서서 인텔과 MS진영은 맥에 필적할 만큼 매력적인 디자인의 노트북을 생산해줄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이데이 노부유키는 세련된 디자인의 소니 바이오로 윈텔 진영의 선봉장이 됐다. 이데이 노부유키는 모바일에서도 선경지명을 보여줬다. 스웨덴의 휴대전화 강자 에릭슨과 2001년 합작 법인 소니 에릭슨을 설립했다. 


이데이 노부유키의 비전은 맞았다. 정작 소니 조직을 비전에 걸맞는 혁신 조직으로 개혁하는데는 실패했다. 이데이 노부유키는 취임 직후 디지털 드림 키즈 전략을 발표했다. 소니를 제조업체에서 디지털 콘텐츠 기업으로 재탄생시키겠다는 비전이었다. 하드웨어 제품간의 연결성을 강화하는 유비쿼터스 전략도 선보였다. 모두가 2022년 디지털 산업에선 당연시되는 전략들이다. 그런데 시대를 앞서 간 이데이 노부유키의 비전은 제품이 아닌 구호로만 남았다. 오히려 이데이 노부유키의 비전을 실현한 건 애플이나 삼성전자나 LG전자 같은 경쟁사들이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소니는 TV시장에선 삼성전자와 LG전자한테 노트북 시장과 워크맨 시장에선 애플한테 차례로 추월당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데이 노부유키의 소니는 베스트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최고를 만들 수 없는데도 최고처럼 보이는 것에만 집착했다. 2003년 명품 가전 브랜드 퀄리아를 런칭한 것이 최악이었다. 경쟁사보다 가격은 떨어지는데 하이엔드 제품이라면서 포장만 화려했고 가격만 높았다. 퀄리아는 소니가 소비자들한테 외면 당하게 만드는 결정타가 됐다. 결국 올 것이 왔다. 2003년 4월 24일 소니 쇼크는 이데이 노부유키한테 치명타가 됐다. 소니가 어닝 쇼크를 기록하자 주가는 30%나 곤두박질쳤다. 일본 언론은 소니 붕괴라고 난리였다. 이데이 노부유키는 월간지 《문예춘추》에 “내가 입사한 이후로도 소니 신화는 적어도 5번은 붕괴됐다”면서 “소니는 신화붕괴라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강해진다”고 썼다. 이데이 노부유키의 호언장담은 실현되지 못했다. 삼성전자한테 시총을 추월당한 소니는 다시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결국 이데이 노부유키는 선배들의 업적을 이어가지 못한 채 2005년 6월 CEO직에서 물러난다. 


지난 6월 2일 별세한 이데이 노부유키 전 소니 회장 겸 최고경영자는 소니 붕괴와 일본 전자 산업의 몰락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데이 노부유키는 뛰어난 비저너리였다. 실제로 취임 초기엔 화려한 성과도 거뒀다. 정작 이데이 노부유키가 거둔 성과는 축적의 시간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었다. 경쟁사들한테 기술 역전을 허용한 소니한테 이데이 노부유키의 비전은 헛된 구호에 불과했다. 이데이 노부유키는 1989년 인수한 소니 콜럼비아를 중심으로 미국의 소프트웨어 조직과 일본의 하드웨어 조직으로 2본사 체제를 구축했다. 이데이 노부유키의 마지막 실수는 후임자로 하워드 스트링거를 선택한 것이었다. 소니의 글로벌화와 자신의 콘텐츠 비전을 이어갈 적임자로 여겼지만 정작 2본사 체제와 맞물리면서 소니 안에서 문화 전쟁만 불러일으켰다. 하워드 스트링거가 물러나고 2012년 히라이 카즈오 체제가 들어서면서 소니는 겨우 내분을 수습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이데이 노부유키는 샐러리맨 신화의 상징이다. 1960년 대학 졸업과 함께 소니에 입사해서 36년만에 CEO가 됐다. 그래서 평사원들 사이에선 인기가 높았다. 소니를 떠난 뒤에도 결코 일을 놓지 않았다. 일본 벤처 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퀀텀 리프라는 컨설팅 회사를 설립했다. 비록 소니를 최고의 IT회사로 지켜내진 못했지만 일본 재계에선 비난보단 존경을 받았다. 소니의 몰락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가 경쟁력이 약화되자 일본 최고의 IT기업도 혁신성을 잃었다. 소니 쇼크는 최고경영자 이데이 노부유키의 책임이지만 이데이 노부유키가 원인은 아니란 의미다. 이데이 노부유키는 일본 침몰을 거스를 수 없었던 일본을 대표하는 전자 회사의 CEO였다. 이데이 노부유키는 《문예춘추》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10년 후 소니가 지금과 전혀 다른 형태의 회사가 되어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늘 공격적인 자세를 잊지 않는 소니 정신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 이데이 노부유키 전 소니 회장이 끝까지 믿었던 소니 정신을 지켜내는 건 이제 소니 직원들의 몫으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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