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그때 예카테리나를 한국인과 결혼시킬 생각이었다.
격세지감이었다. 2010년 전후만 해도 러시아과 남북한의 관계는 지금과는 정반대였다. 2008년 9월 이명박 대통령은 러이사를 국빈 방문했다. 당시 러시아 대통령은 그때나 지금이나 푸틴 정권의 2인자로 통하는 드리트리 메드베데프였다. 물론 실권자는 대통령 연임 제한 때문에 잠시 물러나 있었던 푸틴 총리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가졌고 푸틴 총리와 별도 회담을 가졌다. 그렇게 한국과 러시아는 2008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맺게 됐다. 북한과 러시아가 2000년 맺은 우호 선린 협조 조약보다 강력한 것이었다.
러시아 외교에는 몇 단계의 협력 관계가 있다. 가장 높은 단계는 동맹이다. 그 아래 단계가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이다. 그 아래 단계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다. 그 아래가 우호 선린 협조 관계다. 북한과 러시아는 2000년 7월 우호 선린 협조 조약을 체결했다. 푸틴은 2000년 5월 처음 대통령이 됐다. 두 달 뒤인 2000년 7월 평양을 방문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했다. 당시 푸틴과 김정일이 맺은 우호 선린 협조 조약은 소련 연방 붕괴 이후 소원해졌던 양국 관계를 복원했다는 의미는 있었다. 북러 관계를 북소 수준의 동맹 관계로까지 되돌려놓지는 못했다.
대신 푸틴은 북한보단 한국에 공을 들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9월 러시아를 공식방문했다. 이미 2003년 10월 방콕에서 한러정상회담을 가진 뒤였다. 당시 푸틴의 관심사는 러시아 경제 재건이었다. 2000년대 푸틴의 집권 기반은 올리가르히였다. 올리가르히는 러시아 천연 자원을 독점 수출하는 자원 재벌이다. 2000년대 러시아 경제 성장의 동력은 올리가르히가 주도하는 천연 자원 수출이었다. 푸틴은 동시베리아 천연 가스의 주요 수입국이자 송유관 사업의 협력국인 한국을 상대로 이른바 세일즈 외교를 펼쳤다. 푸틴에겐 에너지 원조가 필요한 북한보단 에너지 고객님이신 한국이 훨씬 매력적인 파트너였다.
푸틴과 한국의 달라진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줬던 사건이 푸틴이 한국의 장인이 될 뻔한 일이다. 2010년 10월 당시 푸틴의 둘째 딸인 예카테리나와 한국 예비역 해군 제독의 막내 아들은 결혼 직전까지 갔었다. 두 사람은 1999년 모스크바 국제학교의 무도회에서 처음 만났다. 에카테리나는 한국어를 포함해서 5개 국어에 능통했다. 두 사람은 함께 미국 유학을 했다. 푸틴도 처음엔 두 사람의 관계를 잠깐 반대했다. 사위감을 직접 보고는 마음에 들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예카테리나는 아버지 푸틴에게 결혼하면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뜻도 밝혔다.
푸틴은 KGB 요원이었던 1983년 러시아 항공사 아에로플로트 항공의 승무원이었던 류드밀라 푸티나와 결혼했다. 이때 연년생으로 큰 딸 마리아와 작은 딸 예카테리나를 낳았다. 푸틴은 전형적인 딸바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빠가 두 딸을 워낙 애지중지해서 엄마 류드밀라 푸티나가 훈육 문제로 불평을 할 정도였다. 2000년 푸틴이 집권한 이후 류드밀라 푸티나는 영부인으로서 공식 석상에 섰다. 마리아와 예카테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만 해도 푸틴의 위상과 이미지는 지금과 같은 독재자가 아니었다. 혼란스러웠던 러시아를 안정시킨 3대 대통령이었다.
결과적으로 혼담은 깨졌다. 2012년 푸틴은 대통령으로서 재집권했다. 푸틴 부부는 2013년 두 딸을 한꺼번에 결혼시킨다. 큰 딸 마리아는 네덜란드 사업가 요릿 요스트와 결혼했다. 둘째 딸 예카테리나는 푸틴의 심복으로 러시아 권력가들의 금고로 유명한 로시야 은행의 2대 주주인 니콜라이 샤말로프의 아들과 결혼했다. 두 딸을 결혼시킨 푸틴 부부는 2013년 전격적으로 이혼한다. 사실상 두 딸의 결혼을 위한 쇼윈도 부부였던 것이다. 결국 정략 결혼을 했던 둘째 딸 예카테리나는 2018년 이혼한다.
이 무렵부터 푸틴은 전쟁을 사고 파는 워로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여전히 권위주의적이었지만 민주적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했던 2000년대의 푸틴과는 전혀 달랐다. 집권 기반부터가 달라졌다. 푸틴은 올리가르히 대신 실로바키를 새로운 집권 세력으로 키워냈다. 실로바키는 KGB 출신과 군정보국 출신과 군산업체가 씨줄날줄로 연결된 은밀한 군산복합 카르텔이다. 올리가르히는 푸틴 정부를 상대로 민주주의와 시장주의를 요구할 수 밖에 없었다.
올리가르히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인 기업이기 때문이다. 반면 실로바키한테 필요한 건 전쟁이었다. 전쟁이 사업이고 권력이기 때문이었다. 푸틴은 2014년 3월 불과 20일 만에 크림 반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2014년 3월 1일 러시아 병력 1만6000명을 크림 반도에 진주시키면서 사실상 무혈입성을 했다. 2014년 3월 16일 크림반도 주민 투표에서 96.6%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러시아 합병을 통과시켰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국제 사회에서 전쟁 국가가 됐고 푸틴은 전쟁광 취급을 받게 됐다. 러시아는 2014년 G8에서 축출당했다. 1998년 G7 정상회의에서 정식 멤버로 합류한지 16년 만에 G8 체제가 붕괴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푸틴은 G7에서 제명당한 게 아니라 자격 정지를 당한 것이었다. 정작 G7은 푸틴의 폭주를 막지 못했다. 2014년 크림 반도 합병으로 재미를 본 푸틴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한다.
실로바키와 결합한 푸틴을 돌려세울 방법은 없었다. 러시아 권부의 요직은 모두 실로바키가 차지한 상황이었다. 2000년대에 푸틴은 소속 정당이 있는 대통령이었다. 현재 푸틴은 무소속 대통령이다. 사실상 실리바키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로바키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도 각종 국제 분쟁에 개입하면서 이권에 개입했다. 바그너 그룹 같은 용병 기업을 활용해서 비공적인 군사 작전을 펼쳐왔다.
2024년 6월 19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핵심은 제4조다. 쌍방중 어느 일방이 개별적인 국가 또는 여러 국가들로부터 무력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타방은 유엔헌장 제51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연방의 법에 준하여 지체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 한 마디로 어느 한쪽이 전쟁 상태에 처하면 지체 없이 군사 원조를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북러가 동맹 수준의 군사 협력 관계를 맺었다는 의미다.
푸틴 대통령이 2000년 이후 24년 만에 평양을 방문할 때부터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을 맺을 것이란 사실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한국과 러시아가 2008년 맺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보다 한 단계 위였다. 한러 관계보다 북러 관계가 밀착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실제로는 밀착이 아니라 밀월 수준이었다. 지체없이 군사 원조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북러가 1961년 북한과 소련의 동맹 관계 수준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실제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정상회담 직후 가진 열린 기자 회견에서 동맹이라는 표현을 3차례라 썼다.
푸틴과 김정은의 밀월은 러시아와 북한이 모두 병영국가라는 점에서 가능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가속화된 러시아의 전쟁 국가화는 이미 전쟁 국가인 북한과 궁합이 맞아떨어진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북한은 러시아의 병참 기지 역할을 해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양상은 참호 전쟁이다. 양국이 종전 이후 그어질 국경선을 고려한 피의 땅따먹기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1차 세계 대전이다. 덕분에 러시아한테 북한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졌다. 현재 재래식 포탄의 최대 생산국은 남북한이다. 북한은 이미 2023년 9월 이후 러시아에 150만 발 이상의 포탄을 보냈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참호 전투에서 러시아가 승기를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번 협정으로 북한은 러시아에 군병력도 파견할 수 있게 됐다. 바꿔 말하면 러시아가 전쟁으로 돈을 벌었듯이 북한도 전쟁을 비즈니스화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의미다. 북한판 실로바키 체제가 등장할 길이 열린 것이다. 푸틴 체제 러시아와 김정은 체제 북한은 모두 전쟁 국가다. 결정적인 차이점은 러시아는 전쟁을 비즈니스화하는데 성공했지만 북한은 계속 가난해지기만 했다는 점이다.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이라고 쓰고 동맹이라고 읽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북한은 러시아의 전쟁 사업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반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북한이라는 충성스런 우방을 확보했다. 2000년대 푸틴은 한국이 필요했다. 2020년대 푸틴은 북한이 필요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북중러 대 한미일의 한반도 신냉전 구도에서 북한의 활로를 모색해왔다. 2019년 이전까지만 해도 김정은은 미국과의 직접 협상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2019년 2월 트럼프 대통령과의 하노이 정상 회담이 노딜로 끝나면서 궁지에 몰렸다. 2022년 2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김정은한텐 기회였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푸틴의 기대와 달리 당기 소모전으로 변질되면서 더 큰 기회가 됐다.
김정은이 그리는 북중러 대 한미일의 신냉전 구도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역설적으로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다. 한국은 2023년 여름 미국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우회 지원했다. 이때부터 한러 관계를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푸틴과 김정은이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정상회담을 연 게 2023년 9월이었다.
반면 중국은 국제적 왕따인 북한과 러시아와 묶이는 것이 손해라고 본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는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커진 상태다. 러시아가 중국 이외에 북한이라는 활로를 찾는 건 중국한테도 좋을 게 없다. 원래 푸틴은 2024년 5월 16일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북한 평양도 연달아 방문할 계획이었다. 중국이 불편해했다.
푸틴이 베이징을 방문한 직후인 2023년 5월 27일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담에 리창 총리를 참석한 배경이다. 북러가 밀착한다면 중국은 북중러보단 한중일로 묶이려는 것이다. 중국은 푸틴과 김정은의 북러 정상회담 하루 전인 2024년 6월 18일에 서울에서 한중 외교안보대화도 열었다. 이것도 중국측이 먼저 요구한 만남이다. 2024년은 북중 수교 75주년이고 북러 수교 75주년이다. 북중 관계는 역대 최악이고 북러 관계는 역대 최상이다.
푸틴 대통령은 2024년 6월 19일 새벽 2시에 북한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국빈 방문인데 새벽에 도착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새벽 2시인데도 혼자 활주로에서 푸틴을 기다렸다. 이것도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푸틴은 김정은에게 최신형 아우루스 리무진을 선물했다. 9개월 전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정상회담을 했을 때도 선물했던 것이다. 회담 이후 두 사람은 아우루스 리무진은 번갈아 몰았다.
서로 같은 차를 탔고 서로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있는 신뢰를 과시하는 전형적인 외교 의전이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2시간30분 동안 통역을 제외한 배석자 없이 단독 밀담을 나눴다. 정상회담에서 밀담 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다. 다자간 정상회담에서도 승부처는 언제나 5분 남짓한 밀담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푸틴과 김정은은 2시간이 넘게 밀담을 나눈 것이다.
2000년대 한러 관계가 가까워지던 시기의 푸틴은 류드밀라 푸티나 영부인과 큰 딸 마리아와 작은 딸 예카테리나를 둔 젊은 대통령이었다. 비록 쇼윈도 부부였어도 푸틴은 대외적으론 정상적인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2020년대 푸틴은 류드밀라 이외에 다른 두 명의 여성으로부터 4명의 혼외자를 둔 것으로 알려진 마초 중의 마초다. 러시아 최초의 미스 유니버스부터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까지 염문설의 대상도 다양하다. 푸틴이 애지중지했던 두 딸은 이미 서방의 제제 명단에 올라가 있는 상태다. 한때는 푸틴의 둘째 딸이 한국 며느리가 돼서 한반도에서 거주할 뻔 했다. 이제 푸틴은 한반도의 리스크가 됐다. 격세지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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