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기로 중, 기도하고 있는 청년크리스천들에게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일까?
군대에서 이 질문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이란 주제로 학위논문을 썼던 한 분의 책을 읽고서
이런 질문에 대한 상담을 해줄 때면, 이렇게 답해주곤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도 서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A와 B 중에 한 가지를 택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너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근데 대부분 이 말을 할 때면 앞 문구가 핵심이 되거나 앞 문구만 기억하려고 한다.
서로 이야기할 때도 앞 문장에 강조점을 둔다.
그래서 굳이 이야기를 하던 중 한번 더 같은 말을 하고선 한 문장을 덧붙인다.
“A, B 중에서는 말씀 안 하실 때가 많지만, 너의 질문에는 늘 말씀하고 계셔. 하나님은 너의 질문응답기라 아니라 너랑 교제하기 원하시는 분이시니깐. “
그러면, 안심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막 하던 사람은, 다시 근심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너무나 많이, 확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분의 뜻을 확인했다. 기독교는 신비롭다.
신비주의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은 확실하며 신비롭다.
놀랍게도, 나의 시선이 하나님의 시선과 닿을 때면
그냥 글이던 성경 말씀이 나의 깊은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따뜻한 대답이 되고
매주 드리는 예배가 나의 깊은 존재에 닿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된다.
어떻게 해야하나며 침울함과 동시에 반짝이는 눈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준다.
“종교적인 언어로 뒤덮인 질문, 잘 포장이 돼버린 질문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어요.
적나라하고, 솔직하게, 포장지가 더 벗겨지고, 상자까지 다 뜯겨진 진짜 질문을 마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해요.
그리고 내 진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면 오래도록 하나님이 나의 진짜 존재에게 말씀하고 계셨음을 만나게 될 거예요. “
참 모호하지만, 정말이다. 많은 청년들이 처음엔 의아해했지만, 결국엔 이렇게 고백한다.
“오늘 예배가 마치 하나님이 저에게만 말씀하시는 소리처럼 들렸어요. 이 날을 준비하고 계셨던가봐요.”
질문을 찾기 위한 질문을 이렇게 하자
“나는 지금 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을까?”
매일매일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좇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대화는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이런 대화가 필요한 사람들은 특별한 선택의 기로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왜 그 기로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본인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질문은 달라진다.
하나님 이 길이 혹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면, 이 길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막연하게 물어본다. 하나님 저 어디로 가야 해요?
아직 자신의 내면과 마주해 본 경험이 별로 없는 것이다.
이 것은 아주 좋은 기회이다. 이제 정말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마주할 차례이다.
먼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 지 알기 위해 발버둥 쳐보자. 난 어떤 삶을 원하는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내 우선순위의 가치들은 무엇인지. 후보 중 더 나은 것을 찾기 위해선 기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준은 먼저 자신으로부터 발견되고, 하나님 안에서 수정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먼저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십자가 앞에서 자백하며 은혜를 구하는 것과 동일한 순서이다.
내가 처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뜻을 발견한 순간은 이렇다.
내가 취업을 준비할 때이다. 어느 회사에 지원을 할지, 어떤 분야에 지원해야 할지, (아직 합격은커녕 지원도 안 했지만) 고민할 때였다.
하나님 저는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할까요? 근데 저는 공학인이라, 의료공학 같은 게 아니면, 사람들 살리는 일 같은 건 하기 힘든데…
무슨 일을 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높일 수 있을까요? 이렇게 한참 기도했다.
그런데, 몇 개월이 흘러도 들리지가 않는다. 이제 선택이 코앞인데.. 아니 이미 늦었는데 안 들린다.
책도 읽어보고 사람들도 만나보고, 여행도 해보고, 영화도 봤다. 매주 새벽기도도 나갔다. 그런데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못 갔다.
그러던 어느 날도 채플에 앉아서 찬양인도곡을 짜다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 예배자~~ 하며 찬양하는데
내 마음이 나에게 묻더라. 너 하나님이 뭘 좋아하시는지는 알아? 어디에 시선이 머물고 계시는지, 어떤 격을 지닌 분인지 알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 그렇다.
난 그냥, 하나님은 어떤 신이든 괜찮았던 것이다. 내 선택을 잘 내리고 싶었을 뿐. 나중에 실패할 때 핑계를 잘 만들고 싶거나 실패하지 않는 선택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아파하는 사람들의 아픔에 귀 기울 이지도, 조금의 관심도 가지지 않으면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묻는 너는 누구냐
네가 찾는 미래에 사람을 살리고 싶은 건, 그냥 기독교에서 떳떳하고 조금 그럴싸한 것들을 하고 싶은 것이지 않아?
진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너의 마음에 있어?
왜 그럼, 너의 삶의 흔적에는 그런 사람들과의 시간이 없어?
처음에는 이 순간이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들은 순간임을 몰랐다.
그리고 주일, 교회에서 소그룹 예배가 있던 날. 그날도 찬양팀으로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 이것이 나의 찬송이요~ 주를 위한 이곳에~ 를 인도하고 말씀을 듣는데 목사님께서 아모스서의 말씀을 전하시는 데,
너무나 크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너희의 비파소리가 듣기 싫다. 찬양소리가 싫다! 시끄럽다. 아이와, 과부와 나그네를 외면하고
너희 살길만 보며 내가 부르는 찬양이 듣기 싫다. 내가 듣고 싶은 찬양은 그게 아니다.‘
찬양 인도를 하며 교회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에요? 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싶어요! 하던 나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얘기하셨다. 거짓말하지 마!!
네가 걸어오고 선택해 온 것들이 너의 진실이야! 네가 시간을 보내고, 네가 마음을 쏟은 게 너의 진실이야!
(그 음성은 따뜻했지만, 내겐 너무 큰 호통 같았다.)
그때에 난 하나님의 뜻을 물은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거창한 꿈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창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안전하게 보장된 선택지를 받고 싶었다.
“A인지 B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나는 너의 중심에 관심이 있어. “
이 말의 무게 중심은 아주 분명하게 뒤에 있다.
거짓되지 않고, 진실된. 내 삶이 그려온 방향과 선택해 온 이야기들이 증명하는 내 중심.
난 내 모습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여전히, 참 자주 그 길에서 벗어나고
참 놀랍게도 하나님의 마음과 다른 마음이 파도파도 계속 나오지만,
그때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내 중심으로 가득 찬 실존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고, 깨어지며, 혼나며, 그렇게 하나님의 꿈을 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