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Where to find. 환상과 일상)
아래의 정의를 계속 기억하며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시선, 마음, 계획, 뜻
- 날 향한 비전: 그중, '나를 통해 혹은 나와 함께'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자 하는 어떤 것
정의를 되풀이하는 이유는, '비전'이라는 용어자체가 너무 거창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단어는 단어마다 분위기, 색채, 질감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것들은 사람마다 그 단어에 얽힌 사건, 상황, 경험, 지식, 문화 등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 같다.
얼마 전에 겪은 쉬운 예가 있다.
출장 차 영국에 들러서, 현지인과 같이 밥을 먹는데 비둘기가 옆 테이블로 올라왔다. 너무 놀란 나는, '비둘기야!'라고 말했는데, 같이 간 동료는 놀라며 미간을 찌푸린 반면, 현지인은 그렇네? 라며 밝은 표정으로 비둘기를 확인했다. (그리고선, 빵 한쪽도 나눠줬다.)
행동 이전에 '비둘기'라는 단어만 들었을 때, 이미 그 단어에 얽힌 사건, 경험, 지식, 문화의 차이는 감정과 생각의 차이로 이어지고, 행동의 차이로 이어진 것이다.
'비전'이라는 용어도 그렇다.
단어자체의 미래지향성으로 인해서, 한국에서 비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용례가 매우 한정적인 탓에 그리고 그리고 교회에서도 간혹 '비전'을 찾으라는 식의 사용법으로 인해 비전이라는 용어가 지나치게 무겁고 거창한 용어로 자리 잡은 경우가 많다.
(일부러, 이 글도 '하나님의 비전'이라고만 했다가 '하나님의 비전을 찾는 방법'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래서 '비전'을 찾는 많은 청년들이 '환상'을 그린다.
'비전을 찾게 되는 순간'에 환상을 그린다.
'찾게 될 비전'에도 환상을 그린다.
'비전'찾기는 '보물'찾기가 돼버린다.
그럼, 나는 이렇게 묻는다.
- 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 넌 무엇을 할 때 마음이 설레? 어떤 걸 잘하는 것 같아?
- 네가 마음이 가는 분야는 어떤 분야야?
- 요즘은 하나님과 어떤 대화를 많이 나눠?
- 하나님께 어떤 칭찬을 받는 사람이고 싶어? 예전에는 어땠어?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 요즘은 하나님이 네가 어떻게 살아가길 바라시는 것 같아? 오늘은 어땠어?
질문의 공통점을 혹시 발견했나?
맞다. 환상에 있는 시선을 일상으로 끌어오는 질문들이다.
그리고 이 질문들이 비전을 발견하는 장소로 초대하는 질문들이기도 하다.
사복음서에는 눈이 어두워 시야가 뿌연 제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유독 시각장애인의 눈을 고치시는 사건이 많이 등장한다. 그 사건들 자체로 의미를 지니지만, 사건들 속에는 아직 뚜렷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제자들(우리)의 영적상태도 포함하고 있다.
전에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당신이 시각장애인에게 길을 안내해 준다면, 당신은 100m 뒤를 알려줄 건가요?
지금 한 발을 어디로 내디뎌야 하는지, 한 발 앞에 무엇이 있는 지를 알려줄 것인가요?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제 이 문제는 쉽게 풀린다.
그 일상 속에서 우리는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상태다.
어딘가를 향하고 있지만, 아직 하나님이 보는 세상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뿌옇게만 보고 있는 우리는 그곳을 말해주어도 알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불안하고 두렵다.
차가 쌩쌩 다니는 4차선 도로를 눈을 감고 지나가는 기분이다.
차가 안 멈추고 그냥 지나가면 어쩌지? 초록불은 몇 초가 남았지? 알 수가 없어서 두렵다.
이 방향이 맞긴 하나? 하며 걱정된다.
그 무서운 곳을, 그 무서운 하루를 하나님 손 꼭 붙잡고 살아가는 매일이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을 찾는 장소이다.
보이지가 않아서
내가 붙잡은 팔이 안전한 팔인지, 팔의 주인은 선한 사람인지, 믿어도 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아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한걸음 내딛으려다 말고 내딛으려다 말다, 한 걸음 내디뎌 보는 하루가 비전의 한 조각이다.
특히나 갈림길 앞에 섰을 때는 더욱 조심스럽다. 몇 갈래로 길이 갈라져 있는지도 모르는 무지함으로 인해서, 혹시 길을 잘 못 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만 커져간다. 그 두려움 앞에서 담대히 하나님께 순교자의 고백을 해보기도 한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냥 내 팔 꼬옥 붙잡고 한걸음 가자' 하실 것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그 팔의 주인이 선한 분이라는 것과 나를 내가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사랑하신 분이라는 걸 한 걸음마다 깨닫게 되어 가며, 점차 눈이 떠지기 시작하고 뒤돌아보면 이렇게 나의 매일이 이어져 왔구나 하게 되는 길이 비전을 발견하는 길이다.
그 과정 속에 우리는 조금씩 이렇게 찬양을 불러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그럼에도, 아마... (청년들을 만나본 결과에 의하면)
많이 불안할 것이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지?' 싶을 수 있다.
답이 될지 모르지만 그러면 난 이렇게 말해왔다.
: 내일 말씀을 읽어보자! 말씀 읽는 게 힘들면 어떤 예배든 드릴 수 있는 예배를 찾아가 보자! 너 상황은 머릿속에서 다~~ 지우고 말씀 안에서 하나님 마음이 어떠하신지만 들어보자. 그러면 내일의 한걸음은 보일 거야.
(놀랍게도, 1시간이 넘도록 이야기하고 그 끝에 난 그저 청년들을 예배의 자리와, 말씀의 자리로 보내는 설득을 했고, 그보다 더 놀랍게도, 그들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비전은 이미 이루어져가고 있다.
스쳐지나 온 수많은 날들의 연속 속에 하나님은 늘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길을 보려고 하지 말고 저 먼 곳을 보려 하지 말고 '옆에 계신 하나님'을 보아라. 그 팔을 꼭 붙들어라.
P.S.
혹시 누군가 비전을 고민하며 찾아오거든, 스스로 답을 주려하지 않기를 바라요. 도와주고 싶고, 함께 해주고 싶을 거예요. 내가 아는 방법과 정보들로 끌어주고도 싶은 거예요. 그러나, 찾아온 동역자를 향한 따뜻한 마음으로, 나의 어떤 선한 마음보다 선하시며 나의 그 어떤 능력보다 능력 있으신 하나님께 보내주세요. 그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마음, 하나님을 향한 진심과 고민을 들어주세요. 다만, 그들이 마음을 지켜내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세요. 최고의 중보자가 되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