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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서 Nov 03. 2018

엄마, 손이 시리지만 재미있어

아이가 6살 때 일이다. 퇴근길에 함박눈이 내렸다. 지하철 창밖으로 눈썰매를 끌어주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직장맘이라는 핑계로 눈이 와도 딸과 함께 눈사람을 만들지 못했다. 딸에게 미안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남편과 아이를 불러냈다. 서둘러 나온 아이의 얼굴에 신나는 표정이 가득했다. 눈을 뭉치며 눈사람을 만들었다. 방수장갑이 아니어서 딸의 장갑이 다 젖어버리고 말았다. 딸은 젖은 장갑을 벗어던지고 맨손으로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손이 시릴 텐데…”

서둘러 끼고 있던 가죽 장갑을 벗어줬다. 손에 비해 장갑이 커서 눈을 뭉칠 수 없었던 아이는 결국 장갑을 벗어버리고 다시 맨손으로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는 내가 “손이 시릴 텐데”라는 말을 계속했나 보다. 딸이 바로 답했다. 

“엄마, 손이 시리지만 재미있어” 

마지막에는 눈썰매를 태워줬다. 차가운 공기 때문에 볼이 빨갛게 되었는데도 신나는지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썰매를 타고 달리는 기분~ 상쾌도 하다.~” 

그만 들어가자고 해도 딸은 더 놀겠다고 한다. 나중에는 ‘그래. 어차피 노는 거 그냥 재미있게 놀아라.’하고 내버려두었다. 8살이 된 딸은 그날 있었던 일을 지금도 이야기한다. 

겨울철에 워터파크에 갔다. 생각보다 물이 차가웠다. 나는 추위에 쥐약이라 물에 들어가기 싫었다. 그런데 딸은 물 온도와 상관없이 입술이 파랗게 될 때까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놀았다. 딸이 “엄마, 빨리 들어와”라고 애걸복걸하면 마지못해 물에 들어가서 아이와 놀아줬다. 물속에 들어가기 전에 차가울까 봐 두려운 마음에 멈칫거렸다. 온몸이 완전히 물속에 푹 들어가면 괜찮아지긴 했다. 딸은 오들오들 떨면서도 물 만난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거리며 퇴장 휘슬이 울릴 때까지 놀았다.


나는 겨울이 추워서 싫다. 딸은 눈썰매도 타고 눈사람을 만들 수 있어서 겨울이 좋단다.  딸은 어떤 상황에서도 ‘재미’를 먼저 생각하고 나는 걱정거리를 먼저 생각한다.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니까 겨울, 워터파크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딸에게 겨울은 재미있는 놀거리가 많은 대상이고, 나에게 겨울은 추워서 피해야 하는 대상이다.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먼저 문젯거리를 생각해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었다. 딸처럼 재미만 있다면 눈사람을 만들 때 손이 시려도 괜찮다. 워터파크의 조금 차가운 물도 괜찮다. ‘재미’ 그걸 느껴보고 싶었다.

‘재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직장에서 외부강사의 강의를 들었다. 외부 강의에 대한 직장동료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렸다. 한 부류는 ‘졸렸다’, ‘재미없다’이고, 다른 부류는 ‘재미있다’, ‘유익했다’였다. 그렇게 반응하는 동료들을 가만히 살펴보니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외부강사가 달라져도 강의에 대한 동료의 반응은 동일하다는 거다. A라는 동료는 매번 외부강의가 ‘좋았다’고 반응하고 B라는 동료는 늘 ‘별로다’라고 반응했다. A는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을 보는 사람이었고, B는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 재미를 느끼려면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황이나 사물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때 거기에서 재미를 느끼고 유익하다고 느낀다. 하긴 부정적으로 보면 불평불만만 눈에 보이니 재미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인생의 롤모델이 생겼다. 재미있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작가이자 강연가 김민식 PD이다. <영어책 한 권 외웠봤니?>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지만, 영어에 관심 없어 그 책을 읽지 않았다. 김민식 작가가 글쓰기 책인 <매일 아침 써봤니?>을 출간했다고 하기에 읽었다. 그는 MBC에서 노조활동을 한 벌로 드라마 연출 기회를 박탈당했다. 드라마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그가 다시 찾은 재미가 바로 블로그 글쓰기였다. 

“한때 드라마 연출가로 살 때는 ‘행운의 영역’에 있었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삶이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회사에서 드라마 연출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드라마국에서 편성국 송출실로 발령이 났어요. ‘생존의 영역’으로 내려간 거죠. 그래도 꿋꿋이 버티며 생존에 집중했습니다. 사는 게 재미가 없더라고요. 삶의 재미를 찾아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 돈은 안 되지만 재미있는 일을 찾은 거예요. (…) 블로그에 올린 영어 공부 관련 글을 모아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라는 책을 냈어요. 이 책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면서 6개월 만에 10만 부가 팔렸어요. (…) 어떤 일이 돈이 될지 안 될지는 누구도 몰라요. 그러니 처음엔 무조건 재미를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돈이 되지 않아도 재미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즐기는 겁니다.”


생각해보니 나도 재미있어서 글을 쓴다. 돈이 되지 않아도 새벽에 일어나서 글을 쓴다. 재미있으니까. 그런데 내 주변에 재미를 느끼면서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어른을 찾기는 어렵다. 아이들은 눈을 만질 때 눈사람을 만들 생각을 하지만, 어른들은 손이 시리겠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물놀이를 할 때 재미있게 놀 생각을 먼저 하지만, 어른들은 ‘춥겠다’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재미를 먼저 생각하지만 어른들은 당장 닥치지도 않은 문제를 먼저 걱정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남는 것은 손이 시린 게 아니라 엄마 아빠와 즐겁게 놀았던 추억이었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어렸을 때는 스마트폰으로 길거리에서 인터넷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초등학생들이 되고 싶은 직업 1위가 유튜브 크리에이터라고 한다. 딸이 살 세상은 더 많이, 빠르게 바뀔 거다. 기껏해야 40년 살아온 내 인생으로 아이의 미래를 재단하고 인도할 수 없다. 예수님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해주고 싶다. 아이가 세상을 만나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재미를 느끼는 단 한 가지라도 있다면 진짜 성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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