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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서 Oct 20. 2018

헐… 그걸 지금까지 신경 쓰고 있었어요?

딸과 목욕을 하면 딸의 귀 바퀴를 싹싹 닦아준다. 딸이 아팠는지 나한테 물었다. 

“엄마, 왜 귀를 그렇게 빡빡 닦아요?” 

“엄마가 어렸을 때 남자처럼 짧은 머리였거든. 그런데 엄마 귀 바퀴가 더러웠나 봐. 그걸 본 선생님이 귀를 닦는 게 예의라고 했거든” 

“엄마, 그때가 언제였어요?”

“엄마가 초등학생 3학년 때니까 10살이었어.”

“헐…. 그럼 그걸 10살 때부터 지금까지 신경 쓰고 있었어요?”

헉~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자각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들었던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무려 30년 동안이나 쭉 신경 쓰고 있었다. 그 말이 가슴에 콕 박혀서 지금까지 귀 바퀴를 세게 닦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 말을 신경 써왔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그 순간 선생님이 한 말에 상처받은 어린 내가 보였다. 선생님이 “귀 바퀴가 더럽다. 그런 건 예의 없는 행동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걸 반 친구들이 모두 듣고 있었다. 너무 창피했다. 수치스러웠다.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나쁜 행동을 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지금 커서 보니, 참 그 선생님은 아이를 상대로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을 했다. 지금은 어른이 된 내가 그 당시 어른이었던 선생님에게 상상 속에서 혼내줬다. 어른이 된 내가 상처받았던 초등학생인 나에게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너는 어렸고, 충분히 그럴 수 있었어. 친절하게 상냥하게 선생님이 알려주면 좋았을 텐데. 친구들 앞에서 창피를 주면서 알려준 그 선생님이 못난 거야. 너에게는 잘못이 없어”라고 토닥토닥해줬다. (놀랍게도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는 딸을 마주 보고 “그런데 엄마가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 선생님, 어린아이에게 너무 심하게 말한 것 같아”라고 덧붙였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어린 시절에 해결하지 못했던 슬픔’을 지닌 어린아이가 한 명씩 살고 있다고 한다. 이 아이는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처럼 존재한다. 심리학자나 정신의학자들은 이 존재를 '내면 아이' '내면 안의 아이' '신성한 아이'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부른다. 이 내면 아이는 한 개인의 인생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는데 특히 스트레스 상황에서 불안, 겁, 자기 의심으로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딸의 말에 놀란 건 내가 자각하지 못했던 ‘내면 아이의 존재’때문이었다. 이런 내면 아이가 내 안에 얼마나 많을까? 병에 걸린 사람이 자기가 병에 걸린 줄 알아야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듯 내 안에 상처받은 내면 아이의 존재를 아는 게 먼저이다. 처음에 귓바퀴에 대한 상처가 있는지 몰랐던 것처럼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상처를 받았는지 모른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는 감정이 남아 있거나 의도적으로 회피한 일들이 아직 가슴에 남아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숨어있는 나의 내면 아이를 만난다. 어린 마음에 상처받고 아파서 의도적으로 숨겼던, 회피했던 어린 나를 말이다. 

딸은 울 일도 아닌데 우는 일이 종종 있다. 그날은 내가 기분이 좋지 않았던 날이다. 별 일도 아닌 일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악을 쓰며 우는 딸 때문에 짜증이 났다.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아이에게 “네가 지금 이러는 행동을 정말 이해할 수 없다”라고 덩달아 소리를 질렀다. 그때 불현듯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유치원 다니기 전이니까 5살이나 6살쯤 일이다. 친할머니가 있었다. 친할머니가 집에서 동네 친구 여러 명과 놀고 있었다. 그때 뭣 때문에 화가 났는지 목소리가 쉴 때까지 악을 쓰면서 할머니들한테 뭐라고 뭐라고 하면서 울었다. 꺼이꺼이~ 숨넘어가는 울음소리가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돈다. 그런 나를 보면서 할머니들이 “어이없다. 이해할 수 없다”라고 화를 냈다. 어떤 할머니는 웃기까지 했다. 분명히 나는 화가 나서 씩씩 거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할머니들이 어이없다는 식으로 웃는 모습에 나는 더 화가 났다. 그때 구체적인 사건은 기억에 없지만, 그 감정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다. 당시에 얼마나 억울했으면 5살이나 6살 때 느꼈던 그 감정이 아직도 내 가슴에 살아 있을까? 어른이 된 후에도 그때 그 억울했던 감정이 가끔 생각났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중에 아이가 악다구니를 쓰면서 울면, 이해할 수 없다고, 어이없다며 하지 말자. 그냥 진심으로 들어주어주자. 내가 듣기에 황당하고 어이없을지라도 웃지는 말자’ 


이렇게 아이를 키우면서 나의 내면 아이를 만난다. 내면 아이를 만나면 어린 딸이 나로 보인다. “그래. 네가 그렇게 악을 쓰며 우는 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 있는 게지.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런 너의 억울한 마음 몰라줘서…”라고 공감해줬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엄마한테 아줌마라고 욕을 해대며 눈을 부라리던 딸이 스르르 나한테 안기며 훌쩍인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해주듯이 딸에게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랬구나. 엄마가 그랬구나. 미안하다. 미안하다. 너를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구나”라고 토닥토닥해줬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의 어린 시절과 비슷한 일을 경험한다. 그 지점에서 ‘자각’ 하지 못했던 내면 아이를 만난다. 그렇게 찾아낸 내면 아이와 나는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잊고 싶었던 아픔을 꺼낸다. 또 상처받을까 봐 방어막을 치고 두꺼운 갑옷을 입었던 그 마음이 스르르 무너진다. 그 안에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상처받은 어린아이가 있다. 어른이 된 나는 내면 아이에게 “괜찮다. 괜찮아”라고 토닥토닥해준다. 

초등학교 시절에 만났던 선생님도 지나가듯이 그냥 흘린 말이었다. 우는 어린아이를 보며 어이없다고 말한 할머니들도 의미를 두지 않는 말이었다. 그 일상적이고 흘러가는 말이 누군가의 가슴에 가시처럼 콕 박혀 있다.  

딸에게 바르고 고운 말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도 울컥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가시 돋친 말을 쏟아내곤 한다. 부모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에 아이는 상처받는다. ‘너는 아침잠이 많아서 성공 못 할 거야’, ‘너는 매사에 게을러’,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서 어떻게 살래’ 같은 말들. 누구나 이런 말을 작정하고 하지는 않는다. 모두 무심코 뚝 하고 뱉어지는 한마디이다. 이런 말들로 아이에게 내면 아이가 생기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공부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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