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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서 Oct 13. 2018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엄마

입버릇처럼 딸을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내 새끼”라고 부른다. 그날도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내 새끼”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딸이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엄마”라고 되받아 쳤다.  

                  

엄마란 모든 새끼에게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다. 엄마는 자기 새끼가 여럿일 수 있지만 그 여럿의 새끼도 엄마는 단 하나밖에 없다. 딸은 나에게 귀중한 존재이다. 배 아파 낳은 딸이 커가는 모습이 참 신기하고 예쁘다.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내 새끼라는 마음이 가득하다. 그런데 나도 엄마이기 전에 엄마의 자식이다. 그동안 내 자식 귀한 줄만 알았지 엄마가 소중한지 몰랐다.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엄마”라는 말이 입속에 계속 맴돈다.               


엄마가 딸을 돌봐주고 있어 퇴근하고는 엄마 집으로 간다. 엄마가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지 못해서 내가 받은 문자에 대한 답장을 보내주곤 한다. 그날은 딸이 계속 놀아달라고 보채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엄마가 문자를 보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확 났다. “다른 엄마들은 70세가 넘어도 잘만 하는데 도대체 왜 엄마는 못하는 거야?”라고 소리 질렀다. 엄마는 새로운 것을 익히려고 하지 않는다.  ‘할머니가 되면 다 그렇다’는 엄마의 변명도 싫다. 안 배우겠다는 거니까.    

                          

그런데 회사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다. 나이 든 직장상사는 매번 같은 한글 기능과 홈페이지 사용방법을 물어본다. 매번 처음 알려주는 것처럼 같은 한글 기능이나 홈페이지 사용방법을 알려준다. 직장상사는 그래도 모르겠다고 아예 해달라고 한다. 그럴 때는 나이 들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해주는 편이다. 그런데 엄마한테는 꼭 이렇게 한 번씩 짜증을 낸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더니 나에게 엄마는 만만한 대상이라서 그렇더라. 엄마는 내가 화내고 짜증내기 손쉬운 대상이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듯 다른 데서 받은 스트레스를 엄마에게 풀곤 했다. 그렇게 해도 뒤탈이 없는 유일한 존재이니까. 좋게 말하면 내 마음의 안식처였고 나쁘게 말하면 화풀이 대상이었다. 영국의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도널드 위니콧은 “부모는 아이로 하여금 보복의 두려움 없이 공격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라고 했다. 엄마는 정말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뭐라고 해도 보복하지 않을 대상이었기에 마음껏 화풀이를 할 수 있었던 거다.            

    

딸의 말을 듣고 나서 뒤돌아봤다. 내 자식이 똥 싸면 똥도 닦아주고 온갖 오물도 다 처리해주면서 왜 엄마의 작은 일 하나 군소리 없이 못 해줄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말이다. 내가 문자를 보내면 단 1분도 걸리지 않지만 엄마가 하면 몇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회사 직장상사한테는 화도 안 내고 매번 같은 잡일을 그냥 묵묵히 해주면서 왜 엄마가 해 달라는 그 작은 일에는 짜증이 나서 상처 주는 말을 내뱉을까?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엄마인데 귀중한 줄 모르고 너무 막대했다. 내 자식은 애지중지 귀하게 여기면서 똑같이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엄마한테는 왜 이리도 함부로 대했을까? 나에게 엄마는 어떤 사람일까?   

             

퇴근 후 아이를 데리러 부모님 집에 가면 가끔 엄마는 모임에 가시고 아빠만 집에 있다. 엄마가 있을 때는 “고생했다”며 저녁밥을 차려주시는데 아빠는 그렇지 않다. 엄마가 없을 때 비로소 엄마의 존재를 인식한다. 언젠가부터 ‘집에서는 엄마가 기둥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없으면 집안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집안일은 요리, 청소, 아이 돌보기와 같은 일이다. 이런 일들은 대부분 엄마가 한다. 집안일은 별거 아닌 잡일로 치부되어 왔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다. 그런 일들을 엄마들은 군소리 없이 해왔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가 없는 집안은 불안하고, 휑해 보인다. 아빠만 있는 집은 무언가 빠진 것 같다. 엄마가 없으면 항상 아빠한테 묻는다. “엄마는 언제 와?” 이렇게 저녁밥을 챙겨주던 엄마가 없어야 비로소 엄마의 존재가 소중해지는 참 어리석은 딸이다.  

        

엄마는 보릿고개 시절 이야기를 자주 한다. 못 먹었던 시절을 겪은 엄마는 먹을 것에 예민하다.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면 자기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 늘 부족했다. 아이들에게는 먹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가장 불행했던 결혼 초기에 식(食)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았다. 그때 몸무게는 초등학생 시절의 몸무게로 얼굴 살이 쪽 빠져서 해골바가지 모양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먹을 게 없어서 못 먹는 게 아니라 소화를 못 시켜서 못 먹는 것이었다. 남편도, 시어머니도 내가 밥을 먹고 다니는지 단 한 번도 걱정해주지 않았다. 나도 뭐가 문제였는지 몰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갔다.        

        

그때 엄마 집에 가면 엄마는 항상 “밥은 먹었니?”라고 묻곤 했다. 엄마가 못 챙겨주니까 배를 곯고 다니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던 거다. 결혼 전에는 ‘쓸데없다’라고 여겼던 “밥은 먹었니?”라는 말에 심장이 멎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게 이렇게 따듯한 말이었는지 몰랐다. 그때서야 밥은 그냥 허기를 채우는 “식(食)”이 아니라 밥은 관심과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엄마의 사랑 방법을 그제야 깨달았다. 오늘도 엄마는 저녁밥을 챙겨주신다. 그게 엄마의 사랑 표현이고 나 또한 이제는 밥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안다.           

    

엄마는 마땅히 존재했기에 당연히 그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존재했던 엄마는 늘 그곳에 있는 당연한 존재였다. 늘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들은 익숙해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런 존재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익숙함이 그 존재의 진가를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가 엄마이다. 사람도, 건강도, 재산도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다행히 나는 엄마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엄마가 있지만 그 소중함, 그 애절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아직은 엄마의 자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못난 딸이지만, 이제는 엄마를 잃어버리기 전에 엄마에게 많이 베풀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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