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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 Oct 02. 2019

말하기도 힘든 날

홈스쿨링 3주 차. 벌써 체력 & 멘탈 고갈.

하.... 지금은 밤 9:27. 아이들에게 알아서 자라고 방으로 보냈다. 책도 읽어줄 수 없는 날이다.

내가 그렇게 예뻐하는 둘째의 목소리도 찌릿찌릿한 소음으로 들리는 날이고, 우리 집의 모든 소리에 반응한다. 꼭 과민증같이 나의 모든 감각이 모두 날 서 있는 느낌이다.


이런 느낌 아주 오랜만이다.

약 2년 전 회사에 다닐 때 극심한 상사 스트레스로 번아웃 됐을 때랑 약간 비슷하다. 그런데 그때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거슬리지 않았다.  


3주 차가 되면서 처음에 야심 차게 정했던 스케줄이 모두 망가진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홈스쿨링은 9시에 시작하지 않으며, 심지어 10시에도 시작하지 않는다. 나는 10시에도 컴퓨터를 잡고 내가 진행하고 있는 2권의 원서 북클럽 읽기 진도 가이드를 만든다. 6시 반부터 일어나서 일을 하면 10시쯤 되면 기력이 떨어져 쉬어야 했고, 아이들은 아침 먹은 순간부터 알아서 노는 시간이었다. 11시나 돼야 뭔가를 시작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도어록 AS부터 식탁 배송까지 오는 사람들이 많아 꼼짝 않고 집에 있었다. 그러다 4시쯤 돼서야 fresh 하게 나가고 싶어서 성수동 갤러리아 포레에 있는 더서울라이티움에서 하는 '더뮤즈: 드가 to 가우디'를 보러 갔다. 올 때 엄청나게 막힐 거라는 것은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집을 나섰다. 뭐라도 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전시는 좋았다. 오랜만에 문화생활을 하니 뭔가 말랑말랑 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의 번아웃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시작되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왔고, 퇴근시간에 걸려 올림픽대로는 꽉꽉 막혀있었다. 갑자기 숨이 답답하고 온갖 스트레스가 안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차 뒷자리에선 둘째 승비가 소리를 꽥꽥 지르며 졸리다고 투정을 부렸다. 그때부터 아이의 소리가 소음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만해. 엄마 힘들어. 너무. 진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계속..'


역시나 첫째는 엄마의 상황을 감지했는지, '엄마 힘들면 내가 도와줄게요. 차에서도 조용히 할게요.'라고 이야기한다. 착한 녀석...  예쁜 마음에 잠시 누그러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히는 도로 안에서 '나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여긴 어딘가.' 생각이 드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집에 와서 또 저녁을 해 먹였다. 오늘은 정말 삼시 세 끼였다. 집에서 다 먹였다. 그것도 다 괜찮은 메뉴들로 먹였다. 심지어 저녁을 하면서 내일 오전에 먹을 당근 머핀도 아이와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것도 하면 안됐다. 오는 길에 그냥 저녁을 대충 먹고 오던지, 아니면 집에서 짜파게티 같은 것으로 때웠어야 했다. 내 상태가 집안일을 할 상태가 아니었는데도 기계적으로 또 그렇게 일을 벌였다. 보통 같으면 둘째와 오손도손 얘기하며 베이킹을 하는데 오늘은 아이가 도와준다고 하는 것들이 모두 거추장스러웠다.


그렇게 밥을 해서 함께 먹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이 아픈 것도 아니고 그냥 목소리를 낼 기력이 없었다.


갑자기 우울해졌다. 이 세상에 나 그리고 아이 두 명밖에 없는 느낌이었다. 아. 이 느낌은 아이 둘이 훨씬 어렸을 때 울면서 육아하던 그 느낌과 비슷했다.


남편은 일주일에 3일 정도는 야근을 한다. 그런 날은 12시가 거의 다 되어 들어온다. 오늘도 그런 날이다. 일찍 들어와도 집을 나가서 12시간을 넘기고 들어온다. 그래도 어제는 일찍 와서 힘들어 보이는 날 보고 헬스장에 다녀오라고 했다.


이런 날은 모든 것에 불만이 생긴다.


왜 회사는 직원이 12시간이나 일을 하게 해야 하는지. 야근을 하면 집에 있는 시간이 7시간도 채 되지 않게 하는지. 야근을 해도 수당은커녕 왜 택시비도 챙겨주지 않는지. 왜 9시부터 시작인데 7시 반부터 일을 시작해야 하는지. 정부 정책은 도대체 어디 회사에 적용되는 건지 모르겠다.


심한 날은 (오늘 같은 날은) 그걸 그렇게 다니는 남편에게도 화가 난다. 왜 그런 회사를 벗어날 생각을 안 하고 계속 그렇게 고된 노동을 하고 있는지. 물론 빅픽쳐가 있겠지만 속 좁은 나는 그저 남편이 좀 더 사람답게 일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답게 적당히 일하고, 집에 와서도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어떤 광고에서도 봤듯이 '저녁이 있는 삶.' 남편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날 한심스럽게 쳐다보겠지.


예전에 이럴 것을 걱정하여 남편이 홈스쿨링에 반대를 했었다. 분명히 넌 힘들어할 거라고. 역시 맞았다. 힘들다. 정신적으로 너무 피로하다. 홈스쿨링 하면서 아이에게 뜻깊은 기간을 만들어주는 거였는데 오늘 내가 한 거라곤 화낸 거, 방치한 거, 무표정하게 있었던 것, 한숨 쉰 거, 인상 쓴 거가 주를 이루는 것 같다.


아까 저녁 먹일 때는 잠시 예전에 전화 왔던 병설유치원에 아직 자리가 있는지 물어볼까도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우선, 오늘 일을 돌아보니 내가 하지 말아야하는 것들이 정리된다. 다음 주는 이것들을 안 하는 것을 목표로 정해야겠다.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1. 아이들의 현장학습(?) 외출을 할 거면 무조건 오전에서 이른 점심에 나간다. 사람들이 붐비는 퇴근시간에 겹치지 않게 그전에 돌아올 수 있는 스케줄을 짠다.


2. 삼시 세 끼는 TV에서나 하는 것. 점심에 신경 썼으면 저녁은 초간단하게.


3. 내 몸이 편한 거라면 돈을 아끼지 말자. (유치원비 굳은걸 쓴다 생각하자) -> 로봇청소기를 사겠다. 베이킹은 아주아주 여유 있을 때 아니면 하지 말자.


4. 힘들면 SOS를 청한다. 엄마나 동생에게 달려간다. 적어도 거기에 가면 이렇게 힘들진 않다. 오늘 힘든 건 하루 종일 혼자 아이들과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5. 밤에 일찍 잔다. 나에게 5시간의 수면은 너무 적은 것 같다. 적어도 6시간의 수면을 위해 12시엔 잠에 든다. (근데 아이들과 남편이 자고 있는 그 조용한 시간이 너무 꿀 같다)


6. 아이들의 홈스쿨링 수업이 있으면 10시에는 꼭 시작한다. -> 일은 10시 전에 끝낸다.


여기서 글을 마친다.

얼른 씻고 TV나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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