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1. 당신처럼 늙지는 않을거라는 말

<피프티 피플>, 정세랑(2016)

by 읽쓰생정
"나약해, 나약해. 내가 널 얼마나 크게 키우려고 했는데. 내 발자국만 밟으면서 따라오면 될 것을."
그 말에 폭발해버렸던 것이다.
"저는요, 당신같이 늙지 않을 거예요. 그게 제일 겁나요."
<...> 그대로 걸어 나왔는데, 2주쯤 쉬고 나니 대상포진이 싱겁게 수그러들었다.

정세랑, 피프티 피플(창비,2016), p.81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은 서로 얽히고 엉킨 51명(제목은 피프티 피플이지만)의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50편의 단편 모음집인 줄 알았는데, 읽을 수록 모든 인물들이 기가 막히게 연결되어 있어 계획했던 양보다 훨씬 많이 읽었습니다. 술술 읽혔습니다. 다양한 환경에 놓인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담히 서술되어 있어, 다른 사람의 일기장을 훔쳐 보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이 책에는 누군가에게는 평범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공감되지 않는(그래도 이해가 되며 불편하지 않은) 인물들이 나옵니다. 전반적으로 일상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과, 누군가는 느꼈을법한 감정들이라 생각되는 서술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정세랑 작가는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한사람이라도 당신을 닮았기를, 당신의 목소리로 말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적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나를 투영할 수 있는 범인(凡人)은 누구인지 찾아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가 될 것 같네요.






오늘, 저는 글 너머의 세상에서 33명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한승조' 입니다.



"저는요, 당신 같이 늙지 않을 거예요. 그게 제일 겁나요."

이는 승조가 사장이 소위 '키워주기 위해' 하는 행동들에 환멸을 느껴 회사를 그만두며 내뱉는 말입니다.


세상에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가장 찬란한 순간들을 꿈꾸며 순간의 시간들을 뒤로하며 나아갑니다. 다만, 그렇게 앞을 보며 걸어가는 동안 꽤나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자신의 인생만이 정답이라는 이상한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사소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본인의 선택이 최선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0%로 봅니다.

(이는 잘못된, 또는 틀린 선택을 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부당한 일을 당하며 원하는 자리에 올라간 이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는 답습하는 유형입니다. 힘들게 버텨 이 자리까지 올라왔으니 나도 누릴 것이라는 마인드죠. 개중에는 힘들었던 과거를 처절하게 곡해하여 지금의 본인을 만든, 숨은 뜻이 있는 훈련방법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당했던 것보다 정도가 낮다며 선심 쓰듯이 말하며 행동하는 이들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들의 머나먼 과거는 궁금하지도 굳이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어디있나요. 부끄러운 일이면 그냥 부끄러운 일인것이고, 꼰대면 그냥 꼰대입니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내 눈 앞에 있는 당신만 보일 뿐입니다.


2. 또 다른 하나는 멈추는 자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내가 초년생일때는' 따위의 말일랑 집어 던져 놓고, 자신이 받고자 했던 행동과 말들을 상대방에게 건네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기억을 미화시키지도, 자신의 영웅담을 늘어 놓지도, 자신의 행동을 생색내지도 않습니다. 그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저 자신이 받고 싶었던대로 해주는 사람입니다.



살다보면, 이 두 유형은 모두 만날 수 있기에 어떤 사람에게 이끌리는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후자의 사람의 비율은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 또한 누군가에게 꼰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해야 될 것 같습니다)


1년, 2년 바뀌는 계절을 느끼며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마주합니다.

그 중에는 닮고 싶은 사람도 있고 치가 떨리게 수치스러운 사람도 있습니다.

'그 때는 어려서 잘 몰랐어' 라는 말이 쓸모 있는 상황은 안타깝게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20대 때 치가 떨리게 싫었던 사람과 언행들은 30대 또는 40대가 되도 이해할 수도, 하기도 싫을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의식적으로 잊는지, 무의식적으로 잊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젊을 때 속으로, 또는 밖으로 외쳤던 외침들을 점점 잊고 살고 있습니다. 난 저렇게는 되지 않을거라고 다짐했던 수많은 순간들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승조의 말은 예전의 제 모습을 기억나게 하면서, 동시에 지금의 저에게 하는 말 같습니다.



커피 한잔(120ml)을 물고기가 살 수 있는 수준으로 정화하기 위해선 1800L의 물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말은 1799L의 물에 커피 한잔 부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는 물이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승조의 말은 열심히 산다는 핑계아래 나도 모르게 20대 순수한 마음에 커피 한잔 쏟은 것은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자신은 없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의 호수가 천천히 오염되지는 않았는지, 내가 싫어했던 당신처럼 늙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당장 어제 행동부터 천천히 떠올려 보고 있습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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