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살어리랏다 Nov 09. 2021

쌓인 눈에 일부러 발자국을 남깁니다.

살아있음을 내가 느낄 수 있도록.

날씨를 보니 이제 곧 겨울입니다.

가을은 온 적도 없는 것 같은데 갑자기 겨울이 문 앞에 서 있습니다.


서울로 올라와 놀란 것 중 하나는 겨울마다 하루 이틀, 또는 일주일 내도록 많은 눈이 내린다는 것입니다. 남쪽 지방에서 다년간 살다가 올라 온 저로써는 눈을 보면, 그렇게 쌓여 몇 날 며칠 녹지 않는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다른 나라에 와 있는 기분입니다. 


어렸을 때는 단순히 눈을 밟을 때 나는 뽀드득 소리가 좋아 밟았다면, 30이 넘어간 지금은 뽀드득 소리에 제 조그마한 소망을 더해 지그시 밟고 있습니다.


'나 이렇게 살아있다'

'나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어!'



눈 없을 때 맨바닥에는 남길 수 없는 발자국을 굳이 눈 쌓인 곳으로 찾아가 굳이 힘주어 밟고 집으로 향합니다. 


뽀드득. 그래, 나 이렇게 살아 있구나

뽀드득. 그래도 나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어






가끔 밖에 나가 일부러 맞을 만큼 저는 눈이 오는 그 순간을 너무나 좋아하지만, 눈이 쌓이는 것은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눈에 찾아 찾아올 때는 그렇게 아름답다가도 땅에 닿아 바로 사라질 기회를 놓친 눈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까맣게 때가 타 어느 곳에나 보기 싫은 흔적을 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이 잔뜩 온 다음날, 때가 타 검어진 눈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을 보면 왠지 그 모습이 제 모습만 같아 우울해질 때가 있습니다. 멋진 꿈을 안고 세상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나도 모르게 내 겉은 까맣게 물들어 그저 가만히 쌓여 있는 눈과 다를 바 없게 된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지 않을 것 같았는데, 누구보다 힘내서 어렸을 때 생각했던 '남들과 똑같게 살고 있는' 제가 가끔은 낯설게 느껴집니다. 언제나 새하얗게 남아 있을 줄 알았지만 서서히 검은 물로 변하는 눈과 요즘의 제 모습은 그리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자동차 바퀴가 지나 자리를 일부러 피해 약간 두께감 있는 눈길로 걸어갑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꾹꾹 내 발자국을 남기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어차피 사라질 거라면 내 흔적이라도 안고 가라고, 햇볕에 이내 검게 변해 사라질 거라면 이렇게 노력하는 나 있음을 품고 가라고. 나 자신에게 말하듯 뽀드득뽀드득 한 발자국씩 흔적을 남겨 놓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엄마한테 자꾸 짜증이 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