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겹치면 인연이 된다
K와 우연히 마주 앉게 된 건 D 독서토론 동아리 집회 후 가진 뒤풀이 장소에서였다.
대학 1학년,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어느 날 학교가 아닌 외부의 한 건물 옥탑방에서 매주 열린다는 영어회화 동아리를 찾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일 높은 층 버튼을 눌렀다. 입구부터 계단 곳곳에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지어진 건물의 연식이 확인됐다. 언제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구형 엘리베이터의 문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옆에 난 쪽문을 통해 옥상으로 향하는 길이 나있고, 계단을 십여 개 올라가니 긴 복도를 따라 비슷비슷한 문 여럿이 나열돼 있다. 이곳은 1980년대부터 오랜 전통을 지닌 대학생들의 아지트로, 전공과 별개로 다양한 관심사, 다양한 대학교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꿈을 찾아가는 곳이었다.
세 번째 방에서 희미한 불빛과 두런두런 말소리가 새어 나온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빼꼼히 안을 들여다보니 20여 명의 남녀 학생들이 둘러앉아 진지한 토론을 벌이고 있다.
'영어회화 동아리가 맞나?' 하는 의심을 할 겨를도 없이 문 앞에 앉아있던 선한 인상의 키 큰 남자가 "처음 오셨어요?"하고 문을 활짝 열어준다. 그는 "부담 갖지 말고 아무 데나 편하게 앉으세요"하고 방 안으로 안내한다. 나는 입구에서 가장 먼 구석에 비어있는 자리를 찾아 무척 조심스럽게 앉았다.
한참 동안 책에 대한 열띤 토론이 진행됐다. 이상하게 기대했던 '영어'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토론이 일단락되고 팽팽하던 긴장감이 늘어진 고무줄처럼 순간 느슨하게 풀렸다.
"우리는 매주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D동아리입니다." 아까 문을 열어준 K가 운을 뗀다. ‘아뿔싸! 방을 잘못 찾았구나!'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한 명씩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이어간다. 각자 소속 학교와 학번, 전공과 이름을 밝힌다. 얼떨결에 나도 이미 내 소개를 하고 있다. 어리바리한 내게 K가 안쓰러운 눈길을 보낸다.
집회가 끝나고 다 함께 뒤풀이 장소로 이동했다. 허름한 골목 끝에 위치한 작은 주점으로 막걸리와 파전을 실비로 파는 곳이다. 나는 가장 구석의 눈에 띄지 않는 자리로 비집고 들어갔다. 여기까지 왔으니 분위기나 한번 보고 가야겠다는 심산이었다.
"잘 왔어요! 오늘 첫 집회 분위기 어땠어요?" 누군가 대뜸 말을 건넨다. 그제야 정신 차리고 보니 다시 K가 앞에 있다. 그날 뒤풀이에서 K와 긴 대화를 나눴다. 나는 이 동아리가 궁금해졌고 결국 그곳의 정회원이 됐다.
우연히 발을 디딘 동아리, 그 뒤풀이 장소에서 다시 만난 인상 좋은 선배 K..., 우연이 겹치면 인연이 된다고 했던가? 그가 바로 지금의 내 남편이다.
"When coincidences pile up, they become inevi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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