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삶의 무늬를 짜는 시작
(정말)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올린다.
그동안 치료실과 강의실, 그리고 연구의 일상 속에서 글을 쓰는 자리를 오래 비워두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늘 글로써 숨을 정리하고 싶다는 바람이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다시 글을 시작해야겠다’는 작은 결심이 숨처럼 차올랐다. 그래서 오늘, 이 첫 글을 내어 놓는다. 완성된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막 직조를 시작한 삶의 무늬처럼.
아침마다 창문을 열면 차가운 공기 속에 작은 먼지들이 햇살을 머금고 부유하는 것을 본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아무런 의도 없이, 그저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그러나 문득, 그 단순한 행위가 얼마나 오랫동안 무심히 흘려보낸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숨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지만, 정작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하루의 분주함 속에서 숨은 단순히 자동으로 오가는 공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느 날, 몸이 무겁게 내려앉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던 순간, 마음이 흔들려 어디에도 기댈 수 없던 날, 나를 단단히 붙잡아 준 것은 다름 아닌 한 번의 호흡이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숨은 단순히 산소를 들이마시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자, 지금 내가 어떤 길 위에 서 있는지 알려주는 나침반이었다. 긴장할 때의 숨은 짧고 날카로웠고, 평온할 때의 숨은 고르게 흘렀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내담자에게는 따뜻한 숨결을 전하려 애썼다. 그들의 불안을 달래고, 그들의 이야기를 품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나의 숨은 언제나 뒷전이었고, 스스로에게는 차갑고 서늘한 숨으로 대하곤 했다. 마치 나의 호흡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그러나 몸이 무너지고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그 서늘한 숨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를 좀 더 바라봐 달라”라고. 그때서야 숨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말해주는 언어였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숨을 실로 떠올린다. 한 올 한 올의 실이 모여 직물이 되고, 직물이 모여 무늬를 이룬다. 숨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야 무늬를 완성할 수 있다. 매일의 들숨과 날숨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결국 지금의 나를 짜내는 실이었다. 숨이 불안정하던 시절의 무늬는 흐트러져 있었고, 숨이 고르게 이어지던 시절의 무늬는 단단했다.
어쩌면 나는 오랫동안 결과라는 무늬만 바라보느라, 그 무늬를 짜는 실—즉, 숨—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성취, 성과, 타인의 시선에만 사로잡혔다. 그러나 실이 엉키면 무늬는 자연히 흔들릴 수밖에 없다. 숨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삶의 무늬를 고르게 짜는 첫걸음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된다.
그래서 요즘은 숨을 의도적으로 바라본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리듬을 관찰하고, 그 위에 몸과 마음을 얹어둔다. 치료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도,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숨을 바라보면 몸이 조금 더 세워지고, 마음도 덜 흔들린다. 호흡이 삶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기둥처럼 느껴진다.
이 깨달음은 단순한 명상이나 호흡 훈련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어떤 무늬를 남기며 살아가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한다. 숨은 결국 나의 삶을 기록하는 일기였다.
나는 오늘 이 첫 글에서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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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숨은 지금, 어떤 무늬를 그리고 있나요?”
숨은 삶이고, 결은 그 삶의 흔적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호흡으로 각자의 무늬를 짜내고 있다. 그것이 고르고 단단한지, 아니면 흐트러지고 엉켜 있는지는 결국 숨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다.
이 글은 이제 막 시작된 나의 여정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실타래 같지만, 언젠가는 조금 더 단단하고 따뜻한 무늬가 되어 있을 거라 믿는다. 그 믿음 하나로 오늘도 다시 숨을 고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 숨을 고르듯 다시 펜을 든다. 타인에게만 따뜻하게 건네던 숨이 아니라, 이제는 나 자신에게도 온기를 나누기 위해서다.
그런 기념으로, 오래 미뤄두었던 브런치 기록을 다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