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5
시작은 즉흥적인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혼자 사는 남동생의 여름휴가 때 함께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다가 우연히 보여준 작은아들의 일본여행 사진이 사건의 발단이다. 작은아들은 올 초 일본에 가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애니메이션, 2002년 개봉작)의 가오나시와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보고 남동생이 지브리파크를 간 거냐고 물어보면서 자연스럽게 작년 11월에 오픈한 나고야의 지브리파크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얘기 끝에 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러지 말고 우리 같이 지브리파크나 가볼까 하고 말을 꺼냈다. 그건 약간 가벼운 인사 같은 그런 거였다. 꼭 가자는 의도는 전혀 없었고 그냥 다음에 또 봅시다 같은 예의상 하는 의례적인 멘트였다. 하지만 남동생의 반응은 예상외로 그렇게 가볍지가 않았다.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바로 지브리파크 티켓팅을 알아보는 빠른 손놀림이라니. 남은 대화 내내 동생의 눈은 아예 폰에 고정되어 있었다. 더 이상 내 말은 듣지 않고 온통 지브리파크에만 빠져서 혼잣말로 티켓을 3장 구해야 한다는 둥 이름이 대창고, 돈도코의 숲이라는 둥 연신 중얼거렸다. 너 진짜 가고 싶구나 하고 웃으며 말을 건넸지만 본인은 극구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눈은 휴대폰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10월 초면 휴가를 낼 수 있다고 말하는 거다. 솔직하지 못하긴… 그렇게 우리의 말도 안 되는 여행이 시작된 거다.
만약 오사카나 교토나 제주도 같은 일반적인 관광지를 여행 가자고 말했다면 남동생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거다. 물론 나도 굳이 남동생과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해보지도 않았었다. 이번 여행이 가능하게 된 건 순전히 우리 둘의 공통점인 만화사랑일 것이다. 우리는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 글을 읽을 수 있던 대여섯 살부터 만화를 좋아했었다. TV에 방영되는 “은하철도 999”나 “코난” 같은 만화시리즈 외에도 소년중앙, 새소년, 보물섬 같은 만화잡지나 로봇찌빠 같은 단행본만화들을 섭렵했고 그 이후 성장하면서도 만화방이나 도서대여점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물론 세부적인 장르의 취향은 다르지만 우리의 만화사랑은 5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우리가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스튜디오 시리즈를 좋아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다. 게다가 그 지브리 테마파크를 간다는 건 참새와 방앗간 같은 그런 상황인 거다. 이건 사이좋은 남매의 여행이라기보다는 지브리동호회의 성격으로 해석하는 게 더 맞지 않을까 싶다.
이런 식으로 빠르게 여행준비를 해본 적이 없다. 말이 나오고 3일 뒤 지브리파크와 비행기표를 예약했고 일주일 뒤쯤에는 호텔예약이 끝났다. 여행 출발 한 달 전쯤 만나서 대략적인 일정을 정했고 역할분담을 했다. 나는 지금까지 가족여행이나 친구들과의 여행을 진행할 때나 거의 혼자 도맡아서 모든 걸 준비했기 때문에 이번 여행처럼 누구와 나눠서 같이 준비한 경험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다른 때와 달리 너무 마음이 홀가분했고 준비과정도 여유로웠다. 잦은 해외출장 덕에 동생이 구글맵 보는 게 익숙해서 교통준비를 맡았고, 통신도 마찬가지 이유로 동생이 맡았다. 나머지 관광지 정보 정도만 내 담당이라 거의 출발하기 일주일 전쯤에야 이것저것 알아보기 시작했다. 둘 다 딱히 줄을 서서 먹는 맛집을 선호하지 않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꽉 짜인 일정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여행의 취향이 잘 맞아서 준비할 때는 술술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여행 스타일도 잘 맞는구나 하고 마음 편하게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던 거였다. 막상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그 기분이 깨져버렸으니까. 역시 밥인지 죽인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거였다.
호텔을 예약하고 며칠 지났을 때 갑자기 동생이 당뇨로 일주일간 병원에 입원을 했다. 먼저 아프다고 연락할 성격은 아닌데, 혼자 사는 동생이 입원수속을 하려면 보호자가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전화를 했다고 한다. 일 년 전부터 당뇨증세가 있었는데 미처 인지를 하지 못하고 너무 늦게 병원을 간 바람에 당수치를 급하게 내려야 해서 입원까지 하게 된 거였다. 퇴원해서도 당분간 하루 3번 인슐린주사를 놓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런 상태에서 여행을 가는 게 맞는 건가 걱정이 되어 물어보니 별거 아니라며 주사기만 챙겨가면 된다고 했다. 살짝 걱정은 됐지만 본인이 괜찮다 하니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동생의 당뇨가 여행의 복병이 될 줄은 이때는 몰랐다. 둘 다 지브리파크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남동생과는 일 년에 서너 번 만나 식사나 하고 몇 시간 얘기를 나누는 정도이지 성인이 되고 나서 우리가 여행 비슷한 걸 한 적이 없다. 동생이 취직하기 전에 3~4년 정도 우리 집에서 살았기는 하지만, 그때도 나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정신없었고 동생은 동생대로 취직준비하느라 얼굴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다. 아마도 나는 너무 쉽게 결정을 한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여행 첫날에서야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남동생은 어린 시절 누나 말 잘 듣는 부하 같은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그때는 항상 내가 간식을 뺏어먹어서 언제부터인가 남동생은 먹을게 생기면 미리 나에게 먼저 한쪽을 떼어주고 본인은 남은 걸 먹고는 했다. 동생이 나에 비해 키가 좀 작은 편인데 그 원인에는 나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은 죄책감이 조금 있다. 그런데 지금 여행동반자는 그 시절의 내 기억 속의 말 잘 듣는 만만한 남자아이가 아니라 내가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생경하고 불편한 것들이 꽤 있었다. 어쨌든 저쨌든 우여곡절 끝에 우리 남매의 첫 번째 여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