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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키우기

20240220

by 모래알

항상 다양한 식물이 가득한 온실 같은 집을 가지고 싶었다. 신혼 때는 남편에게 결혼기념일 선물로 해마다 화분을 받고 싶다고 했었다. 남편이 내 말대로 화분을 매년 선물했었다면 우리 집에는 최소 25개의 식물이 자라고 있을 텐데. 남편의 기준에는 화분이 좋은 선물이 아니었던지 내 기억에는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난 이후로는 매년 생일선물로 화초를 달라고 한다. 이렇게 식물 선물을 좋아하는 것에 비해서 성공률이 높지가 않다. 요즘은 그나마 좀 실력이 늘어서 3개 받으면 1개 정도 겨우 안 죽인다고 해야 할 거 같다.


요 몇 년 동안 잘 자라던 금전수가 이파리가 자꾸 노랗게 시들고 있다. 최근에 너무 물을 자주 준 것이 화근이 되었다. 친구에게 선물 받은 게발선인장은 겨울만 되면 화려한 진분홍꽃으로 나를 웃게 해 주었는데 올해는 꽃 한 송이 올라오지 않았다. 베란다에 잘 두었던 화분을 굳이 거실 책상으로 옮겨왔는데 그게 원인이었다. 게발선인장은 꽃을 보려면 완전한 어둠이 필요해서 전등불 영향을 덜 받는 곳에 놓아두어야 한다고 한다. 새벽까지 거실 형광등불빛 아래 놓여있어서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식물 키우기는 금붕어나 거북이, 강아지, 고양이 등의 키우기에 비하면 난이도가 낮은 편인데도 이렇게 어려운 건지 모르겠다. 물과 햇빛 이 2가지만 제대로 신경 쓰기만 해도 큰 문제없이 키울 수 있다는데 왜 이렇게 쉽지 않은 걸까?


식물은 결과가 너무 이분법적이다. 사느냐 죽느냐 딱 2가지뿐이다. 제공되는 환경이 맞지 않게 되었을 때의 결과가 죽음이다. 매번 키우던 화초가 죽는 경우는 물을 적게 줬거나 혹은 물을 너무 많이 줬거나 거의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회복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동물들처럼 배가 고프다고 표현을 하거나 혹은 배가 부르다고 그만 먹는 행동조차 할 수 없는 수동적인 태도만 취할 수 있는 식물이라 그렇다. 마치 소심한 사람들이 혼자 가슴속에 상처를 켜켜이 안고 속앓이 하다가 끝내 화병이 나는 것과 흡사하다. 식물의 경우는 그 화병의 결과가 죽음이라서 더욱 극단적이다. 무언가 잘못되기 시작할 때 바로 신호를 주면 더 쉽게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수줍은 표현을 계속하는데 둔감한 내가 그걸 알아채지 못해서일 수도 있겠다. 섬세한 눈으로 관찰하고 한결같은 맘이 필요하다. 매번 잘하다가도 한두 달 챙기지 않고 내버려 두면 바로 잘못되어 버리곤 한다. 예민한 식물도 문제이지만 식물을 대하는 내 가벼운 마음도 식물 잘 키우기를 방해하는 요소이다. 키우기라면 이미 다양한 경험치를 가지고 있다. 두 명의 아기를 20세 이상의 성인남자로 키운 경험이 있고 한 마리의 보스턴테리어 강아지를 7년째 키우고 있다. 이 정도면 꽤 잘 키우는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데 식물의 경우는 20년 이상 경력이라고 해도 여전히 초보인 것이다.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화초를 은연중에 무생물처럼 가볍게 여기는 얕은 마음이 문제이다. 그의 죽음에 한두 번의 속상함을 느끼고 다시 새로운 식물을 사면 된다는 딱 그 정도의 감정뿐인 것이다.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는 소모품이나 인테리어용품으로 생각하는 걸 수도 있겠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간에 키운다는 것은 정성 어린 마음이 필요하다. 이때의 정성은 내가 아니라 상대가 만족해야 하는 것이다. 물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식물에게 물을 과다섭취하게 하면 안 되고, 직사광선을 피해야 하는 식물을 햇볕에 놓아두면 안 되는 것이다. 그가 잘 자랄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최대한 유지하게 해 주는 것이 정답이다. 나는 두 명의 아들에게 각각 원하는 환경을 잘 제공했었던 것일까. 어쩌면 두 아들과 강아지는 내 한결같지 않은 변덕스러운 행동을 덜 예민하게 받아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잘 키운 것이 아니라 그냥 알아서 잘 컸을 수도 있겠다. 이제 예전보다 키워야 할 존재도 줄어들었으니 조금은 식물들에게 마음을 더 기울여서 희망하던 초록초록한 집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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