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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시인

20231115

by 모래알

올해는 남편과 내가 결혼한 지 25년째 되는 해이다. 결혼 25주년이면 은혼식, 50주년이면 금혼식을 한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생판 남인 두 사람이 만나 25년이라는 긴 시간을 같이 지냈으니 기념할 만한 날이긴 하다. 사실 제사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은 나는 은혼식 기념으로 여행을 추진하기로 했다. 8월경에 여행을 가기로 하고 장소를 물색하던 중 몽골이 눈에 띄었다. 남편이 원하는 대로 비행시각이 짧은 곳이다. 거기에다 우리나라와는 다른 생경한 경치와 광활한 땅, 고비사막의 밤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별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들에 관심이 생겼다. 하지만 여행정보들을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결국은 몽골여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개발되지 않은 아니 개발하려고 해도 인구 대비 너무나 땅이 넓어서 도시가 아닌 지역은 땅값도 공짜라는 곳, 당연히 넓은 초원에서는 화장실을 쉽게 만날 수 없는 곳이다. 인터넷에는 여행 후기로 우산이나 양산을 펼친 채 볼일을 보고는 했다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난 이 부분에서 여행을 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상상을 해보자. 패키지여행 도중 갑자기 배가 아픈 상황을 떠올리면 얼마나 그 순간이 힘들지를. 일행들이 기다리는 동안 허허벌판 저 멀리서 우산을 펼치고 볼일을 봐야 하는 내 모습을 떠올리고 나니 더 이상 몽골여행을 추진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편의 의견을 물어봤더니, 이 남자는 너무 편하게 답을 한다. 자기는 어릴 때 시골에서 그렇게 아무 데서나 볼일 보고 살았기 때문에 그 상황이 전혀 낯설지도 않고 문제 될 것도 없다고 한다. 과민성대장증후군인 남편이 당연히 나와 같은 생각일 줄 알았더니 의외로 쿨하다. 이래저래 미련이 남아서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답은 정해져 있다. 내가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대자연을 보고 싶은 여행을 준비했는데 결국 내가 좋아하는 자연이란 건 어쩌면 진짜 자연은 아니었던 거였다. 도시에서 창문으로 바라다보는 인공적인 풍경, 딱 그 정도의 자연을 원한 건가 보다.


결혼하고 처음 전세살이한 아파트의 거실창이 우연히도 산을 바라보는 위치였었다. 때문에 그 이후 아파트를 구할 때 내 조건은 무조건 거실뷰가 산이든 공원이든 골프장이든 건물이 보이지 않는 자연이어야 했다. 탁 트인 거실창을 바라보며 살아온 나는 다른 건물에 가려지는 집은 너무 답답하게 느껴진다. 지금 집으로 이사 온 이유도 역시나 공원뷰 때문이었다. 한적한 공원은 자칭 자연을 좋아하는 내게 딱 맞춤이었다. 이런 나를 보고 몇 년 전 남편이 슬며시 은퇴하고 시골로 가서 살고 싶다고 운을 띄우는 거다. 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남편 혼자 내려가서 살라고 엄포를 놓았다. 나는 온통 자연으로 둘러싸인 시골에 살고 싶은 마음이 1도 없다.


외딴집에서 사는 건 너무 무서워서 싫고 그렇다고 담너머 옆집이 들여다 보이는 그런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는 집에서는 더더군다나 살고 싶지 않다. 게다가 시골이라니, 난 도시의 문화생활을 즐기면서 아파트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다. 보고 싶은 전시회도 보고 친구들이랑 서울 나들이도 가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도시사람인 거다. 아늑한 환경에서 가끔씩 느끼는 자연이 좋은 거지 오롯이 자연에 있고 싶은 건 아니다. 막냇동생이 캠핑 갈 때 같이 가자고 하는 것도 번번이 뿌리친다. 왜 편안한 잠자리를 놔두고 생고생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역시나 화장실도 문제이고. 난 이제 어쩔 수 없는 도시인인걸 인정해야겠다. 안락한 환경이 필요한, 화장실이 딸린 방이 있는 아파트가 필수품인 사람이다.


내가 살고 싶은 도시는 자연과 같이 공존하는 그런 곳이면 좋겠다. 사람도 행복하고 동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곳을 꿈꾼다. 언젠가 TV프로에 나왔던 갈라파고스 같은 곳, 가로수 아래 벤치에서 물개가 낮잠을 자고 사람들은 그 옆을 산책하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 공원을 산책하다 가끔 만나는 너구리나 고라니들을 보면 너무나 반가우면서도 그 친구들이 잘 지내던 집을 우리가 뺏어서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공원을 관리한다고 산책로가 아닌 산이나 들판의 풀들을 짧게 베어버린 걸 볼 때면 굳이 그래야 하나 싶고 그 속에 살고 있었을 친구들이 걱정스럽기도 하다. 언젠가 만났던 병든 너구리도, 길가에서 풀을 뜯어먹던 토끼도 아마도 죽지 않았을까 하면서도 행동하지 못하는 소극적인 나는 그냥 생각뿐이다. 행복한 도시인의 삶을 자연과 함께 공유하며 살고 싶다면 너무 무리한 소망 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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