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이야기

20240319

by 모래알

주부경력 27년 차가 되어도 매 끼니때마다 뭘 만들어 먹어야 하나 하는 고민은 여전하다. 초보시절과 비교하면 요리하나를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할 수 있는 음식의 개수가 크게 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메뉴선정은 참 쉽지가 않다. 가족들에게도 자주 뭐가 먹고 싶냐고 물어본다. 눈치 없는 남편은 매번 아무거나라고 답해서 내 성질을 돋운다. 그래서 나름 규칙을 세웠다. 무조건 최소 2가지 음식을 말하라고. 이래저래 고민하다가 김밥으로 정했다. 아이들 어릴 때는 소풍날마다 김밥을 싸주었다. 아이들도 좋아하고 초등학생 입맛인 남편도 워낙 김밥을 좋아해서 20줄 정도 만들면 다들 질려하지도 않고 하루종일 배불리 먹었다. 소풍도시락을 쌀 일이 없는 지금도 가족모두가 좋아하는 메뉴라 자주 해 먹는다. 분식집에서도 김밥을 배달시켜 먹지만 역시 집에서 만든 김밥이 질리지 않고 더 맛있다.


작은아들이 겨울방학이었던 요 근래는 특히 더 김밥을 자주 해 먹었다. 저렴한 가격에 혹해서 시금치를 한 박스 사는 바람에 달걀과 시금치, 당근 3가지 재료만으로 꼬마김밥을 했다. 반응이 좋아서 며칠 후에는 푹 시어버린 김장김치와 달걀, 당근 역시 3가지 재료만으로 김밥을 만들었다. 그것마저도 귀찮을 때는 그냥 충무김밥으로 한 끼를 해결했다. 어떤 재료를 넣어도 김밥은 우리 집 인기메뉴이다. 주말메뉴로 김밥을 할 거라고 했더니 작은 아들이 이번엔 또 무슨 김밥이냐고 물어본다. 모든 재료가 다 들어간다고 답을 했더니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김밥을 먹는다며 함박웃음이다. 잘 먹으면서도 내심 아쉬웠나 보다. 달걀, 맛살, 햄, 당근, 단무지, 우엉 그리고 시금치 대신 세발나물 이렇게 재료를 준비했다. 세발나물이 들어갔다는 건 비밀로 했다. 모르고 먹으면 그냥 시금치려니 하는데, 굳이 잘 먹지 않는 세발나물이라고 말하면 또 한소리 듣지 싶었다. 이렇게 은근슬쩍 싫어하는 재료를 몰래 넣을 수 있는 것도 김밥의 장점이다.


역시나 이번에도 김밥으로 아침, 점심, 저녁 3끼를 모두 잘 해결했다. 메뉴 하나로 하루식단을 해결하니 고민거리도 줄었다. 게다가 다들 맛나게 잘 먹고, 몸에 좋은 야채도 잔뜩 들어가서 영양적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식사다. 김밥은 참 신기하다. 각각의 재료가 모두 합쳐진 맛은 전혀 새로운 맛을 만든다. 1+1=2라는 덧셈의 법칙을 초월해서 2개 이상의 결과를 준다. 평소에 잘 먹지 않던 당근이나 우엉도 김밥에 들어가는 순간 한몫을 단단히 하고, 별 재료 아닌 것들이 김 한 장과 밥에 말아지는 순간 조화로운 맛으로 탈바꿈한다. 나는 충무김밥을 좋아하는데, 밥이랑 김 딱 2가지 만의 재료로도 그냥 맛있다. 그렇다고 김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올시다이다. 김밥은 좋아하지만 굳이 김에 밥을 싸서 먹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식탁 위에 김이 올라와있어도 거의 손 한번 대지 않을 정도이다. 이 정도로 김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김밥을 잘 먹는 것은 모두 다 어우러져서 나오는 맛 때문일 것이다.


여러 가지 재료가 섞인 음식이라면 비빔밥도 빼놓을 수 없다. 다양한 나물과 고추장, 참기름을 넣어서 비벼먹으면 역시나 복합적인 맛이다. 김밥이 모든 재료들이 균일하게 자리를 차지한 맛의 합산에서 나온 시너지가 있다면 비빔밥은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운 합이다. 비빔밥을 아무리 골고루 섞었다 하더라도 김밥의 공평한 규칙에 비교할 수가 없다. 한 알 한 알의 김밥이 주는 맛의 범위가 일정하다면 비빔밥은 매 숟갈마다 다른 맛을 던진다. 비유하자면 김밥은 김환기화백의 그림(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같은) 같다면 비빔밥은 잭슨폴락의 자유자재로 뿌리는 그림 같다. 그 불규칙적인 섞임 때문인지 아니면 고추장의 강한 맛을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나는 비빔밥보다는 그냥 밥 따로 나물 따로 먹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어쩔 수 없이 비빔밥을 먹어야 한다면 고추장을 넣지 않고 먹는다. 김밥이 재료의 합 이상의 풍부한 맛을 만들어낸다면 비빔밥은 예측가능한 합의 맛이다.


우리들 살아가는 인생도 어찌 보면 김밥 같다. 김밥이 단순 합산의 맛이 아닌 것처럼 삶도 우리가 생각했던 데로 잘 들어맞지 않는 경우들이 많다. 예측불허의 맛, 예측불허의 인생인 것이다. 지금 현재 나의 모습이 수년 전 생각했던 모습이 아닌 것처럼. 이 정도 노력이면 되겠지 하고 진행했던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기도 하고, 별 기대 없이 하던 일들이 술술 잘 풀리고 뜻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줄 때도 있다. 김밥이나 인생이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필요한 재료들을 준비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맛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몸에 좋은 재료들을 마련하고 잘 말기만 하면 된다. 한 장의 김 위에 따뜻한 밥을 펼친 후에 준비한 재료들 각각을 가지런히 놓고 둥그렇게 잘 말면 끝이다. 재료들의 시너지가 내는 맛은 이미 내 손을 떠나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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