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별을 쫓고 있는가
나에게 제일 첫 번째 '별'에 대한 기억은 여섯 살로부터 시작한다. 우리 부모님은 같은 지방 도시 출신으로, 엄마의 친구를 통해 엄마와 아빠가 만나 결혼을 했고 아빠의 직장이 있던 서울로 올라오게 되어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명절이거나 휴가 때에는 일가친척들을 만나러 부모님의 고향으로 내려가곤 했다. 바다를 끼고 있는 곳이어서 바닷가에도 놀러 갔던 기억은 있지만 잠깐 물장구치는 정도였었다.
그런데 여섯 살이었던 그 해엔 근처에 있는 섬에 아빠의 친구가 살고 있어서 그 섬에 놀러 가게 되었다.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배를 타고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달렸다. 섬에서 놀았던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데 그때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건 바로 밤하늘의 별이었다. 밤이 되니 섬은 더더욱 어두워졌고 별들이 하늘에서 쏟아질 것 같이 많이 매달려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어느 정도 세다 포기했다. 숫자를 셀 수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세다가 이 별을 셌는지 안 셌는지 헷갈려서 더 이상 셀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여섯 살이었던 아이가 대학교에 입학하고 또 졸업을 하고 스물넷에 사회인이 되었다. 원하던 대로 비교적 큰 규모의 회사에 들어갔던 나는 회사에 들어오게 된 것에 감사하며 퇴사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란 존재는 너무 작아서 나 하나쯤 없어져도 괜찮은 기계의 부속품 같다는 생각이 자라나기 시작했고 그것이 계속 커져 가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하고 있는 회계라는 업무의 특성상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는게, 회계 업무는 주기가 있어 일정 주기를 두고 업무가 반복적이기 때문이었다. 또 큰 회사일수록 좁은 분야의 일만 하기 때문에 더 그랬을 수도 있다.
그렇게 처음으로 다닌 회사의 퇴사를 고려했을 때의 내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당연히 많은 고민이 되었다. 그런데 인생을 하나의 선으로 생각하고 60살쯤 돼서 나를 돌아봤을 때, 스물일곱에 회사를 그만둔 일은 그리 크지 않은 작은 점 하나 정도로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만두고 쉬기로 했다. 그 김에 그동안 미뤄뒀던 라식 수술도 하기로 결심했다.
라식 수술 전에 미리 검사가 필요하다고 해서 퇴사를 한 달여 앞두고 검사를 받으러 갔다. 거기서 안내하는 대로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검사를 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검사 중간에 부르더니 내 검사 결과지를 보고는 녹내장일 수도 있으니 큰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받고 괜찮다는 결과가 나와야 수술을 진행해줄 수 있다고 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지? 당황했지만 검사를 받아보고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하며 다시 동네로 돌아와 동네에 있는 비교적 유명한 안과에 갔다. 다시 무언가 검사를 하고 젊은 의사 선생님이 앉아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의사 : 녹내장입니다.
나 : 네? 뭐라고요?
의사 : 녹내장이라고요.
녹내장이라는 단어를 어디선가 들어보긴 했어도 뭔지는 잘 몰랐다. (사실은 지금도 잘 모르는 것 같다.) 나는 그저 라식 수술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가 중요했다.
“그럼 라식 수술은 못하는 거예요?”
“네. 라식 수술은 하면 안 되고 환자분은 젊으니까 앞으로 진행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죠?”
“젊은 사람이 암에 걸리면 진행 속도가 빠르듯이-암세포가 빨리 퍼지니까-이것도 마찬가지예요. 종국에는 실명하는 병이에요.”
아는 게 없으니 더 물을 것도 없이 끝난 의사와의 이 짧은 대화에서 의사의 말투는 단순히 건조하다 못해 굉장히 무례하다고 느껴졌다. 톡 까놓고 말하면 진짜 싸가지없네, 란 생각부터 들었다. 나는 웬만큼 친절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크게 불만을 갖지 않는 편인데 이 사람은 정말 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나에게 병을 진단해서가 아니다. 그 상황에서 하는 말들이, 특히 거기에서 느껴지는 어조가, 부연설명이 그런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너무 젊은 의사여서 경험이 많이 없어서 그랬을까?
녹내장이 최종적으로는 실명을 할 수도 있는 병이 맞기는 하다. 그런데 나는 말기도 아니었고 초기였는데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었나? 아니, 사실을 설명해 준다기보다 무슨 자기가 신인 거 마냥 나에게 판정을 내리는 느낌이 강했다. 남들보다 좀 마르긴 했지만 보기보다 건강하게 잘 살아온 나에게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일이란 말인가. 라식 수술은 이제 뒷전이었고 뭐? 실명을 할 수도 있다고? 그럼 앞을 못 본다는 거야?
같이 병원에 갔던 엄마도 우울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와 이것저것 찾아봤다. 그렇지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억울한 마음뿐이었다. 내가 마음씨를 곱게 안 쓴 것도 아니고, 남들한테 피해 안 주고, 내 자리에서 착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것뿐인데.
게다가 이런 기분을 아직 다 추스르지도 못했는데 다음날 친구와 약속이 있었다. 이제 곧 퇴사를 앞두고 있어서 퇴사를 하자마자 해외여행을 가려고 준비 중이었고 마침 비슷한 시기에 퇴사를 한 친구가 있어 같이 여행을 가기로 해 친구와 만나 여행 계획을 짜기로 했었다. 약속을 취소하지 않고 일단 친구를 만났다. 그런데 머릿속엔 자꾸 어제 들었던 병에 관한 생각들만 떠올라 대화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와 얘기하는 도중에 말을 꺼냈다. ‘사실은 내가 병원에 다녀왔는데 말이야… 이러이러한 병 이래. 실명할지도 모른대.’ 친구에게 얘길 했더니 가슴이 약간 시원해진 거 같았지만 결국 친구도 이 병에 대해 잘 모르는데 내가 갑자기 말을 꺼내 당황한 거 같았고 뭔가 불편함만 더해지고 말았다. 친구도 그저 어설픈 위로밖에 해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은 그렇게 그 친구와 헤어졌고 다음 주에 또 다른 친구를 만났다. 그런데 나에게 가장 최근에 생긴 이벤트인 이 병 얘기를 해야 하나 고민이 되는 것이었다. 이번엔 일단 꾹 참고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한 번을 그렇게 잘 넘기고 나니 그 뒤로 만나는 친구들에겐 굳이 이 병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이건 결국 내가 지고 가야 할 문제였다. 종국에 실명할 수도 있다, 내가 젊으니 진행 속도가 빠를 수 있다, 라는 것이지 앞으로 약을 넣고 관리하고 또 기술이 좋아지고 있으니 뭔가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후로 매일 저녁 자기 전, 일정한 시간에 안약을 넣는 습관이 생겼고 6개월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며 진행 상황을 본다. 6개월마다 병원에 가면 꼭 6개월마다 생명 연장을 보장받는 느낌이다. 안압이 올라가면 내가 6개월 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몸 관리를 잘 못한 느낌이 들어 죄책감이 들고, 안압이 그대로 유지되거나 조금이라도 내려가면 내가 지난 6개월 동안 잘 살았구나 하며 살짝 뿌듯해지곤 한다.
병원에 갈 때마다 하는 검사는 똑같은데 그중에 1년마다 하는 시야검사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꽤 중요한 검사라고 한다. 녹내장은 보통 초, 중기에는 발견하기가 어려운데 초기에는 시야 결손이 있어도 본인이 느낄 정도가 아니기 때문에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회사 건강검진이나 나처럼 라식 수술을 위해 수술 전 검사를 시행하다가 발견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병의 진행상황을 보려면 시야 결손이 진행되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고 들었다.
이 검사는 어두운 방에 들어가 탁자 위에 올려진 기계 앞에 앉는 것부터 시작한다. 방에 계신 선생님이 손에 딸칵, 소리가 나는 버튼을 쥐어 주면 턱받침에 턱을 올리고 눈 앞의 구球 안쪽을 응시하면 검사가 시작된다. 지금 검사를 하고 있는 눈의 눈동자는 구의 정가운데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 구 모양으로 된 눈 앞의 공간의 곳곳에서 주황색 빛이 ‘반짝’하고 사라지고 또 ‘반짝’하고 사라진다. 그 ‘반짝’하는 순간에 버튼을 눌러야 한다. 빛을 따라가지 말고 눈동자는 가운데 가만히 둔 채로 빛을 감지했을 때만 눌러야 한다.
처음엔 잘 몰랐지만 이제는 이 검사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검사대에 앉을 때마다 더 두려웠다. 내가 진짜로 보이지 않아서 누르지 않은 그 순간순간이 모두 고통이었다. 실제로 지금 불빛이 반짝거리고 있는데 내 시신경의 세포 일부가 죽어서 그 부분은 아무리 반짝거려도 보지 못한다면? 약 5분이라는 시간 동안 이 기계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나는 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버튼을 누르지 않고 있지? 그냥 보이지 않아도 마구잡이로 눌러야 하는 건가? 그럼 검사의 신뢰도가 바닥을 칠 텐데? 눈동자는 반드시 가운데만 바라보고 있으라 했지만 얼굴을 돌리고 눈동자를 구석구석 돌려서 하나의 불빛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된다.
버튼을 누르지 않는 그 조용한 시간이 영원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검사실에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 다른 환자들도 같은 검사를 받는다. 적막과 어둠이 흐르는 검사실에는 선생님도 없고 나와 다른 환자들만 남는다. 조용한 가운데 버튼을 누르는 딸깍 소리만이 서로 반복된다. 저 사람이 누르고 있는데 나는 왠지 누르고 있지 않으면 초조해졌다. 저 사람이 누르는데 왜 내 기계에는 불빛이 안 나오는 거 같지? 아니, 불빛이 나오고 있는데 내가 못 보고 있는 건가?
옆 사람의 소리에 휩쓸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한번 흐트러지기 시작하면 자꾸 눈동자를 굴리게 되고 다른 사람의 딸깍 소리에 휩쓸리게 된다. 이건 마치 면접장에서 다대다多對多로 면접을 볼 때, 나는 내 페이스대로 대답하면 되는데 자꾸 옆 지원자의 대답이나 분위기에 휩쓸릴 때와 같았다. 그렇게 분위기에 휩쓸려 검사를 마치게 되면 검사의 신뢰도(에러율)가 좋지 않다. 그런 결과를 들고 가서는 선생님이 정확한 진행상황을 판단해줄 수 없다. 그러는 사이 검사는 끝이 난다.
반원구의 시야 검사대에서 나는 별을 보는 천문대를 떠올렸다. 천문대는 천체 망원경을 둘러싸고 반원구의 큰 덮개로 덮여 있다.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보기 위해서는 이 천문대 덮개가 열리면서 밤하늘이 나타나고 밤하늘 곳곳엔 별들이 박혀 빛난다. 처음으로 갔던 내일로 여행의 마지막 날 밤, 나는 강원도 영월의 천문대에 별을 보러 갔었다. 맨 눈으로 보이는 별들도 있었지만 망원경을 통해 보았던 빨갛고, 노랗던 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이후에 혼자서 씩씩하게 찾아갔던 대전의 천문대에서는 날씨가 좋지 않아 망원경으로 별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대신 아래 반원구 모양의 밤하늘을 가진 플라네타리움에서 가짜 별들을 봤었다. 그 뒤로도 나는 여행 가는 곳마다 밤하늘의 별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심지어 올해는 본격적으로 별을 보기 위해 몽골에 여행을 가려고 했었는데 전 세계적인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해외여행 자체가 어렵게 되어 여행 계획을 세워 보지도 못한 채로 끝나버렸다.
나는 왜 이렇게 별을 쫓아다니고 있는 걸까?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들의 그 꾸며낼 수 없는 자연스러운 반짝임과 아름다움, 대자연의 무언가에 압도되어서? 아니면 내가 어떤 '특정한' 자리에 있는 별들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영영 보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서?
우리는 ‘젊음’을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하지만 이런 경우엔 ‘젊다’는게 결코 좋지 않은 조건이다. ‘젊다’는 것은 살 날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인데 앞으로 살아내야 할 그 긴 시간이 내 병이 진행될 수 있는 기간이 된다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이다. 과연 언제까지 내 눈앞의 것들을 두 눈으로 온전하게 볼 수 있을까?
하지만 누구나 마음에 품은 비밀 하나쯤은 있을 것이고, 모르긴 몰라도 나처럼 병을 가진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단지 말을 하지 않는 것뿐이다. 몇 년 전, 한동안 극장에 갈 때마다 나오는 한 휴대폰 광고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단언컨대 가장 큰 축복입니다'라고 말하는 이병헌의 목소리가 그 다른 어느 때보다, 어느 대사보다 가슴을 찔렀다.
어렸을 때 위인전에 자주 나왔던 헬렌 켈러가 했다는 그 말을, 지금의 나는 누구보다 그 의미를 너무나 뼈저리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별은 똑같은 자리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데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자리에서 빛나는 별은 절대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 순간의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저 그런 자리들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몇 만 광년을 달려와 그 자리에서 빛나는 별들을 내 두 눈으로 온전히 보기 위해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별들을 쫓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