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를 좋아해서 참여하게 된 국토대장정의 추억
퇴근하고 집 주변의 천변을 자주 걷는다. '자, 이제 오늘도 걸어볼까'하며 아파트를 나서 천변으로 진입하고는 오른쪽과 왼쪽 중 어느 방향으로 갈지 결정하고 나서야 본격적인 걷기가 시작된다. 발을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머릿속엔 오늘 일어난 일 중 마음에 걸리는 일이나 아니면 좋았던 일 혹은 다른 공상들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이렇게 걷기를 하면 결국 집이나 목적지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아마 대학교 4학년 1학기를 보내고 있었던 그 시절의 나도 이렇게 걸으면서 '걷는 건 좋은데 결국은 걷다가도 집으로 돌아와야 하니 걷는 범위가 제한되잖아? 그럼 국토대장정에 가보면 어떨까? 적어도 국토대장정에 가면 그냥 목표점만 향해서 가면 되는 거잖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집 근처에서 걸을 때의 단점은 내가 돌아올 수 있는 만큼만 갔다가 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냥 날이 너무 좋아서 혹은 분이 풀리지 않아서 아무 생각 없이 계속 걷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는 택시를 타던가 지친 상태로 집까지 걸어와야 했다. 회차지점을 너무 빨리 잡으면 집까지 와서도 뭔가 덜 걸은 듯한 기분이 들어 반대 방향으로 좀 더 걸어갔다 와야 한다. 그렇다고 회차지점을 너무 멀리 잡으면 집까지 오는 동안 너무 지쳐버리게 된다. 그래서 걷다가 어느 지점에서 돌아올지 정하는 게 참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목표점만 향해서 걸으면 되는-된다고 생각했던- 국토대장정에 가기로 결심했다.
요즘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 당시엔 박카스 국토대장정 때문인지 국토대장정이 일종의 유행이었다. 처음에는 우리 국토를 직접 걸어본다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된 것이었겠지만 나중에는 의미가 살짝 변질되어 이걸 다녀오고 이력서에 쓰면 기업에서도 알아준다더라, 하는 식이 되어 기업에서 주최하는 것뿐만 아니라 민간업체에서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도 민간업체보다는 공신력 있는 몇몇 군데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낫지 않겠나 싶어 유명한 곳에서 주최하는 것들은 경쟁률도 치열했고, 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마침 우리 학교 학생회에서 우리 학교 학생들만 참여할 수 있는 국토대장정을 매년 진행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 해에도 국토대장정 인원 모집을 알리는 공고가 떴고 우리 학교 학생만 받는 거니까 경쟁률이 치열하지 않다고 아니 오히려 모자라는 경우도 많으니 지원하면 거의 다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지원했고 당연히 합격했다. 국토대장정을 하며 입을 단체복과 수건, 커다란 배낭도 선물로 받았다. 오리엔테이션으로 학교 뒤에 있는 산 자락에도 올라갔다 왔다.
한 달 전부터 운동화를 사서 길들이고 집 앞의 천변을 가볍게 걸었다. 흔히 국토대장정 코스는 서울-부산 코스가 제일 많은데 그 코스는 전에 이미 갔던 코스였고 우리 학교 프로그램은 매년 코스를 바꿨기 때문에 그 해엔 다른 코스로 진행되었다. 부산에서 출발해 남해안을 쭉 따라 서쪽으로 간 다음 전라남도로 진입해 완도까지 그대로 걷다가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들어가 한라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코스였다.
8월 초, 학교에서 대절한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부산은 처음 가보는 곳이었는데 부산을 즐길 틈도 없이 부산역에 내려 고사를 지내고 정해진 코스를 따라 출발했다. 새로운 도시에 온 것이 신기했고 또 나 혼자 걷는 것과 목표점을 두고 여러 명이 함께 걷는 것은 체력도 그렇고 기분도 그렇고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발에는 생전 처음 물집이 잡혔고 살이 타기 시작했다. 첫날은 첫날이라 그런지 많이 걷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도 괜찮았는데 둘째 날, 셋째 날... 날이 갈수록 점점 지쳐만 갔다.
8월 한여름의 더위 그리고 본인의 짐을 본인이 지고 간다는 것, 그건 엄청난 일이었다. 행군하는 군인들의 심정을 몸과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나름 짐을 줄인다고 줄인 건데 내 짐이 이렇게까지 무거웠었나? 싶었다. 그리고 여름옷이니까 가볍겠지, 했는데 이게 바로 내가 지금의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삶의 무게였다. 나는 분명 우리 조원들과 같이 걷기 시작했고 발은 계속 걷고 있는데 이상하게 조금씩 조원들의 뒷모습을 보며 걷고 있었다.
그러다 조원들의 모습도 점점 멀어지고 그다음 조, 그다음 조... 그러다 맨 뒷 조의 맨 마지막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걷다 그마저도 점처럼 작아져 안 보이게 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처음엔 힘내라고, 용기를 북돋워주곤 했지만 다들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고 무리의 맨 마지막을 호위하는 담당자와 함께 걷다가 결국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혼자 걷는 것을 포기하게 했다.
내가 혼자 여행 온 것이라면, 혼자 국토대장정을 하는 것이라면 상관없으나 이건 단체로 진행되는 행사다. 정해진 시간까지는 다음 야영지에 도착해야 하고 그래야 씻고 저녁 먹고 휴식도 좀 취한 뒤 정해진 시간에 취침을 해야 다음날 일정에 맞게 움직일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사람들과 너무 멀어지는 바람에 5일 동안 차를 두 번이나 얻어 타고 야영지에 늦게 도착했다. 차를 얻어 타는 경우는 길에서 쓰러지거나 혹은 물집 등으로 인해 도저히 걸을 수 없다고 먼저 도움을 요청하거나 나처럼 무리에서 너무 멀어지는 경우들이다.
이 국토대장정의 규칙 중 하나는 차를 세 번 타게 되면 탈락이라는 것이다. 한, 두 번은 봐줄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모든 일정의 마지막 코스를 차 타는 걸로 채워버리면 그 사람은 그만큼 덜 걸은 것이 되니 완주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탈락자가 되면 그 길로 집으로 가야 한다.
다섯째 날 아침,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출발은 경상도에서 하지만 저녁에 도착하는 야영지는 전라도가 되는 셈이었다. 이 날 아침에 많은 인원들이 탈락했다. 출발 전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탈락한 대원들이 앞으로 나와 한 마디씩 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우리는 우리대로 길을 출발했다. 속으로는 저 탈락한 무리에 끼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 초반에 떨어질 사람들은 대부분 떨어지고, 중반부에 접어들기 시작하면 어느 정도 페이스를 잡은 상태이기 때문에 끝까지 많이 간다고들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 날 세 번째로 차를 얻어 타야만 했고 다음날 아침,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혼자 앞에 나가 서게 되었다. 적어도 어제는 탈락자가 여러 명이어서 그들끼리의 유대감이 있어 보였는데 그 날은 탈락자가 나 혼자였다. 서러웠다. 나는 물집이 나서 못 걷는 애들처럼 걷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 걷고 있는데 발이 앞으로 나가지 않아서, 속도가 나지 않아서 자꾸 뒤처진 것뿐이었는데.
사람들 앞에서 울먹이며 인사를 하고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것 같은 낯선 도시인, 뉴스에서만 이름을 들어보았던 '광양'의 버스터미널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그때는 여행에 전혀 취미도 없던 내가, 몇 년 뒤 그곳을 다시 지나가게 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로 그저 혼자 억울한 마음, 자신만만하게 출발했는데 결국 완주하지 못해 쪽팔린 마음을 다스리며 그렇게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