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있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
엄마가 서오릉에 놀러 가자고 했다. 나는 당시 스물넷에 취직해 신입사원으로 3년간 다닌 회사를 제 발로 걸어 나온 스물여덟의 자발적 백수였다. 퇴사하면서 바로 이직을 하지 않았고 좀 쉬면서 학원도 다니고 서서히 취직도 준비하고 있는 그런 상태였다.
남는 게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놀고 있다고 해도 막상 놀러 나가려고 하니 마음이 불편해져서 거절할까 하다가 '그래,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엄마랑 평일에 놀러 가겠어. 그리고 엄마가 요새 동생 때문에 힘드니까 같이 산책도 하고 그러면 엄마 기분도 좀 풀어지지 않을까?'싶어 같이 따라나서게 되었다.
전혀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가 중학교 2학년 때였나 미술 시간에 점묘화-이게 맞는지 모르겠는데 펜으로 점을 찍어서 그림을 완성시키는 것-를 하기 위해 사진을 가져오라고 했었다. 나는 과제에 쓸 사진을 찾기 위해 앨범을 뒤지다 서오릉 풀밭에서 놀고 있는 내가 크게 나온 사진 한 장을 가져가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사진을 보고 점을 찍어서 사진과 비슷하게 만들면 되는 거라 그나마 미술에 젬병인 나에겐 쉬운, 안성맞춤인 과제였다.
그래서 서오릉에 간다고 하니 사진 속 그 서오릉의 넓디넓은 잔디밭이 떠올랐던 거다. 엄마랑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게 벌써 20년 전이었다. 20년 후의 나는 이렇게 커서 어른이 되었는데 서오릉은 그 자리에서 20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해보았다. 아니다. 사실 능은 그게 조성되었을 때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테니까, 아마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20년 전 소풍을 갔을 때의 서오릉과 지금의 서오릉엔 달라진 점이 있었다. 2009년에 조선왕릉 유역 40여 개 모두가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면서 이후로는 좀 더 체계적인 보호와 관리를 받고 있는 듯했고, 그 당시에 내가 뛰어놀았던 것으로 기억한 잔디밭엔 모두 출입금지 펜스가 쳐져 있었다.
그래도 그 풀밭을 찾기 위해 한참을 걸었다. 몇 군데의 묘역을 지났지만 그런 넓은 풀밭은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사람도 없고 해서 방향을 바꿔서 반대편인 익릉으로 갔다. 엄마가 왠지 그쪽일 거 같다고 해서 갔는데 신기하게도 그쪽에 사람이 많았고 소풍 나온 어린이들도 많았다. 그러면서 엄마가 덧붙였다.
아마 여기인 것 같아.
그렇지만 똑같은 풀밭이라도
그때는 네가 어렸기 때문에
더 넓어 보였을 거야.
나는 엄마의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증거를 남겨두기 위해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는 풀밭을 바라보았다.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이 그때의 나처럼 뛰놀고 있었는데 좀 큰 5,6세 아이들도 있었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천방지축 막 걸어 다니는 3,4세 아이들도 보였다. 풍선을 나눠주는데 막 터뜨리고, 놓치고 또 울었다.
20년 전의 나는 터지지 않는 무지개색 비치 발리볼 같은걸 가지고 놀았다. 나는 사진에서 그걸 봤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는데 엄마도 정확하게 '무지개 색'이라고 해서 너무너무 신기했다. 당시에 시간이 되는 엄마들은 소풍에 따라와도 된다고 해서 그때 엄마가 동생도 데리고 함께 왔었다고 했다.
낮의 짧은 소풍을 마치고 집에 와서 저녁에 컴퓨터를 끄고 정리하고 자려다가 그 서오릉에서 공을 들고 찍었던, 내가 비교적 크게 나왔던, 중학교 미술시간 실기 때 썼던 그 사진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앨범을 꺼내 들었다. 큰 앨범을 찾아봤는데 없었다. 설마 있을까? 하면서 아빠가 정리해 놓은 작은 앨범을 봤다. 없었다. 다 엄마, 아빠의 과거 사진들 뿐이었다.
그렇게 무심하게 앨범을 툭툭 넘기는데 엄마, 아빠의 신혼여행 사진이 나왔다. 아빠는 양복을 입었고 엄마는 잔뜩 힘을 준 헤어 스타일에 보라색 긴 원피스를 입고 구두를 신은 모습으로 사진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뭐라고 할 새도 없이 갑자기 눈물이 북받쳐 올랐다. 밤늦은 시각이었는데 자고 있는 가족들을 울음소리로 깨울 순 없으니 입을 틀어막고 꺽꺽 대며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나이인 20대의 엄마, 각진 얼굴이었지만 아주 젊고 예쁘고 옷차림에 매우 신경 쓴 엄마가 사진 속에 있었다. 먹고사는 게 힘들어서, 자기보다는 애들 뒤치다꺼리하느라, 애들 좋은 거 먹이고 예쁜 거 입히느라 본인한테는 신경도 못썼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나랑 똑같은 20대였던 거다.
이 사진은 분명 예전에도 봤던 적이 있는 사진이었고 그땐 아무렇지도 않았었는데 갑자기 왜 그랬을까? 오늘 엄마랑 점심 먹으면서 엄마가 나에게 "그나마 요새 너랑 말도 많이 하고 어디 많이 같이 다니고 그러네."라고 한 말이 가슴에 남아서 그런 걸까.
확실히 20대 초반보다는 20대 후반에 들어서고 있는 지금, 엄마와 좀 더 친밀해졌다고 느낀다. 20대 초반에는 나도 동생처럼 엄마를 미워했었다. 무조건 공무원 공부를 하라고 하고, 집에 맨날 일찍 들어오라고 구속하는 엄마가 싫었다. 그걸 극복해내기 위해서는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도 필요했고 나 자신의 노력도 필요했다.
나는 공무원 공부하라는 엄마 말을 듣지 않고 취업을 준비해 다행히 졸업하고 2개월여 만에 괜찮은 곳에 취직하게 되면서 잔소리는 모두 끝이 났다. 엄마에게 미안해졌다. 엄마도 그냥 똑같이 꾸미는 거 좋아하고, 친구 만나서 수다 떨고 그랬던 평범한 사람이었을 텐데 엄마가 되면서 그 모든 걸 포기하고 살다 보니 어느새 오십이 돼버린 것이다.
엄마,
말주변도 없어
애교도 없어
고집도 은근 세고
잘 안 먹고 살도 안 찌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한테 ‘딸내미 밥 안 먹여요?’라는 소리 듣게 해서 미안해.
다른 집 자식들처럼 좋은 학교 못 나오고 대기업 못 들어가서 미안해.
나는 엄마 같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사실 누구를,
어떻게 좋아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사랑받는 방법도 모르겠고
그리고 병을 알게 된 뒤로는 더더욱 내 몸 망가져가면서 임신 같은 거 하고 싶지 않고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딸내미야.
지난번에 지나가는 말로 '혼자 살 거야 어쩌고 저쩌고'했다가 엄마가 엄청 놀라는 걸 봤어.
나도 아직은 모르겠어.
독신주의자는 아니지만 어쩌면 이러다가 그냥저냥 혼자 살게 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하곤 해.
그래서 또 불효를 저지르게 될지도 몰라 엄마.
항상 미안하고 고마워.
앞으로도 얘기 많이 하고, 들어주고, 같이 놀러도 다니고 그러자.
그렇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