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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Sep 11. 2020

그저 한 그릇의 따뜻한 수프가 필요했을 뿐

감기가 올락 말락 할 때 내게 떠오른 음식

     일요일 저녁부터 목이 간질간질했다. 그리고 월요일에 출근을 했다. 컨디션이 조금 다운되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한여름인데도 커다란 그릇에 담긴, 이제 막 끓여져 나와서 뜨겁고 보글보글한 수프 한 그릇이 그렇게 먹고 싶었다. 하지만 수프는 대부분 사이드 메뉴란 인식이 강해서 단독으로 파는 곳이 잘 없다. 간혹 샐러드 카페 같은 곳에서 팔긴 해도 작은 그릇에 담겨 온기를 머금은 정도로 따뜻하게 나올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곁다리 메뉴로 나오는 '적당한' 수프가 아닌, 수프 그 자체가 단독 메뉴인 아주 뜨거운 수프 한 그릇이 먹고 싶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할 일들을 마치고 자기 전 침대에 앉았다. 올여름은 비가 정말 많이 왔는데 오늘 밤 또한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밖에는 정말 비가 미친 듯이 퍼붓고 있었다. 창문을 살짝 열어 놓으니 빗소리가 시원하게 울려 퍼지고 노란색 간접조명 하나만 켜니 바로 이곳이 카페가 되었다. 어제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잔뜩 빌려왔기에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히라마쓰 요코의 <혼자서도 잘 먹었습니다>라는 음식을 주제로 한 에세이 책을 펼쳤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어제까지 읽은 부분을 뒤로하고 다음 페이지로 넘기자마자 '어쩐지 더 바랄게 없어진 기분 : 수프'라는 소제목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것은 운명이었다.


     이 책에는 한 꼭지당 음식 하나가 등장하고 인물들이 등장해 해당 음식과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나간다. 나는 수프를 후룩후룩 먹듯이 그 꼭지를 열심히 읽어나갔다. 이번 편의 주인공인 쓰보미는 퇴근 후 켠 텔레비전에서 한 요리연구가가 하는 말을 무심결에 듣는다. 



꼭 명심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뭐니 뭐니 해도 수프가 제일 중요해요.
뜨거운 수프 한 그릇이면 더 바랄 게 없어요.



     퇴근길에 사 온 음식으로 저녁을 때우려고 했던 그녀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려 6개월에 한, 두 번 본인이 만들어 먹는 특제 수프를 만들어 먹기로 한다. 이 '미네스트로네'(이탈리아식 토마토 야채수프)는 그녀가 10년 전부터 만들어온 것으로, 누군가 자신 있는 요리가 뭐냐고 묻는다면 단연 이것을 꼽을 정도인 음식이다. 


     책에는 재료와 그녀가 요리하는 방법이 묘사되며 수프를 갓 끓여냈을 때의 느낌 그리고 며칠을 두고 계속 끓이면서 맛이 다르게 변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읽으면서 '아, 나도 이 수프 한 그릇 먹고 싶다'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쓰보미는 회사 근처에서 괜찮은, 제대로 된 수프 집을 발견하고는 어렸을 때 식탁에서 엄마가 된장국을 먹으면 몸이 따뜻해진다고, 된장국만 제대로 먹어도 감기에 안 걸린다고 했던 말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스타벅스에 갔는데 마침 수프 메뉴가 눈에 띄었다. 평소에도 있었는데 내가 이제야 관심이 생겨서 보인 건지 아니면 이제 수프 메뉴를 출시한 지 얼마 안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커피를 먹을 마음도 없고 해서 수프를 시켜 보았다. 수프가 담긴 지름이 넓은 컵 그릇에 수프는 약 50%가량만 담겨 있어 야박해 보였다. 차라리 그릇 크기를 줄이고 수프를 70, 80%선으로 담아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지만 역시 뜨겁지 않았다. 그냥 온기가 있는 정도.


     퇴근길에 슈퍼에 들러 오뚜기 수프 가루를 샀다. 직접 물에 풀어서 끓여 먹는 수프 가루로, 경양식 집에서 돈가스 옆에 나온 그 수프의 맛과 비슷하다.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는 종종 엄마가 이 수프를 해주셨었다. 내가 컨디션이 안 좋았을 때 죽 대용으로 해주실 때도 있었고 그냥 간식 겸 해주셨던 적도 있었다. 


     오늘은 내가 직접 수프를 끓여보기로 했다. 물 양 조절이 어려울 것 같아 물을 좀 부족하게 넣고 모자랄 것 같으면 보면서 더 넣기로 했다. 다행히 물컵 3개 분량만 넣었는데 딱 좋은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집에 마침 모닝빵이 있었다. 냉장고에 있어 차가워진 모닝빵을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렸다. 그리고 식탁에 앉았다. 수프를 살짝 한 입 뜨고 후후 불어서 먹었다. 맛있었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기분. 그리고 아까 데워서 따끈해진 모닝빵을 죽 찢어서 수프에 찍고는 베어 물었다. 맛있었다. 나는 그저 이렇게 뜨끈한 걸 먹고 싶었다. 그래, 이 수프 한 그릇이면 된 거야.


     그나저나 우리나라엔 왜 수프만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는 잘 없는 걸까? 그날 저녁 잠자리에 누워 내가 아주 작은 수프 가게를 운영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이 가게의 주 메뉴는 오직 수프이고, 곁들여 먹는 몇 개의 빵과 약간의 음료 정도만 판매한다.


가게에는 1,2인용 테이블과 창 밖을 바라보며 먹게 되어있는 자리 두어 개와 

주방을 둘러싸고 앉는 자리 몇 개 정도가 있는 작은 가게이다.


직접 손으로 심플한 디자인의 메뉴판을 만들고, 아래에는 각 메뉴마다 들어가는 재료를 적는다. 

메뉴판은 내가 할 수 있는(혹은 하고 싶은) 언어인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로 기재되어 있다.


물론 포장도 된다.

일본 만화의 심야식당 같은 분위기까진 아니더라도,

뜨끈한 수프를 먹고 마음이 풀어진 손님들과 한, 두 마디 정도 주고받을 수 있는 거리감을 유지하고 싶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맛있게 먹고 그걸로 인해 마음이 풀어졌다면 충분하다. 


일반적인 외국인 손님이나 영어를 할 수 있는 손님이 온다면 영어로 주문을 받고

일본인 손님이 온다면 일본어로 인사를 하고

프랑스어를 쓰는 손님이 온다면 프랑스어로 대화하고

중국어 쓰는 손님이 온다면 중국어로 반겨주는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그런 수프 가게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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