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어느새 2021년도 1분기가 끝나가고 있다. 오전에 팀장님께서 팀원들을 잠깐 불러 모으시고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업무를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급작스런 지시를 받는 일도 하다 보니 본래 하던 일이 있는데 중심을 잃고 휩쓸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연말에 있는 인사평가는 결국 우리가 세운 MBO로 평가를 받는 것이니 MBO에 세웠던 목표들을 놓치지 않고 할 수 있었으면 해요.
그리고 다들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나만 따로 부르셨다. 해 줄 말이 있다고 하셨다.
팀장님께서 요즘 피터 드러커의 '자기경영노트'란 책을 읽는 도중 어떤 문장을 봤는데 내가 떠올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리 뒤편에 놓아두신 그 책을 꺼내셨다. 책의 초판 연도는 2003년이었다. 팀장님이 대학생일 때 읽고 이번에 다시 읽는 거라고 하시면서 이 책을 통해 인사이트를 많이 얻는다고 하셨다. 원래는 책에서 본 정확한 문장을 읽어주려고 하셨는데 결국 그 페이지는 찾지 못해서 기억에 남아있는 대로 얘기해주셨다.
조직에서는 직급이 올라갈수록 개인의 시간을 더 요구한다. 대강 이런 뉘앙스의 문장이었다. 나는 작년에 팀장님께 주 35시간 제로 고용 계약을 바꾸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사전에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갑자기 내뱉은 말에 팀장님은 많이 놀라셨을 것이다. 팀장님 입장에서는 갑자기 날벼락 같이 쏟아진 말이었겠지만, 나는 그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말을 할까 말까를 고민한 후 입 밖으로 옮기기까지는 거의 한 달이 걸렸다. 팀장님은 놀라셨던 거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각이 틀리지는 않지만 조직의 생리에 대해 이야기하시면서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나가자고 하셨다.
그 뒤로 나는 출근시간을 아침 8시로 변경했고 5시에 퇴근하려고 노력(?)했다. 남들이 다 일하고 있는 시간에 나만 사무실을 먼저 빠져나가는 것이 분위기 상 조금 이상하긴 했으나 나는 8시부터 나와서 일을 했기 때문에 잘못한 건 없었다. 그리고 출근해서 30분간은 원하는 공부를 해도 된다고 하셨다. 그렇다고 업무와 아예 관련 없는 아주 개인적인 것들을 다 오픈되어 있는 자리에서 할 수는 없어서 영어 공부나 자격증 취득을 위한 인터넷 강의를 듣곤 했었다.
요즘 일하기 싫다는 마음이 많이 커져버린 상태라 티를 안 내려고는 하지만 나도 모르게 티가 나서 힘이 없어 보였을 수 있다. 팀장님은 조직에서는 당연히 너에게 많은 걸 요구할 수밖에 없지만 꼭 너의 방식을 지켜나가라고, 대신 업무시간 안에 할 일은 다 하고 다섯 시에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꼭 퇴근하라고 다시금 말해주셨다. 나는 나름 잘 지켜가면서 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는 한국이고 모든 업무에는 기한이 있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범위의 일들도 있다. 그런데 요즘은 회사(조직)와 개인(나) 사이에서 다른 지점의 간극을 느끼고 있다.
팀장님께선 요즘은 어떻냐고 물으셨다. 저는 최대한 다섯 시에 퇴근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므로 알아서 잘 조절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뒤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회사는 직급이 올라갈수록 급여를 더 주고 그만큼 더 많은 책임과 권한을 주며 회사에 시간을 쏟기를 원하는데 나 개인적으로는 그걸 바라지 않는다면 이것은 서로에게 손해가 아닐까요?
게다가 어느 한쪽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면? 이런 경우 대부분은 개인이 양보를 할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타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개인이 양보하지 않겠다는 것은 이 회사를 나가겠다는 것과 동일한 뜻이 되지는 않을까. 내가 일을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승진에 관심이 없고 회사에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쏟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팀장이나 팀장 대행의 역할을 하게 된다면 마땅히 퇴근 후 저녁이나 주말에 오는 대표이사의 연락을 받아야 하고 업무시간이 아닌데도 급하게 자료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감당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장기적으로는 개인과 조직 서로에게 전혀 좋지 못한 관계가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마음을 잘 숨기고 회사에 계속 다녀서 직급이 오른다면, 팀장이 된다면? 그렇다면 계속 조직과 반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이런 나의 생각을 굽힐 의지가 없다면 내가 이 조직을 나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나라의 조직이 그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지점쯤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타협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조직 없이 혼자서도 해나갈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설 것인가? 그리고 혼자 우뚝 일어설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조직을 떠나 혼자서 일어설 수 있을까? 나를 어떻게 증명해낼 것인가?
첫 번째 회사를 그만두면서도 느낀 점이 그거였다. 나는 여태 OOO(회사 이름)에 다니는 누구누구였다. 그렇게 말하면 어느 정도 이 사람이 괜찮은 직장에 다니고 있으니 괜찮은 사람이겠구나라는 평가를 받기가 좀 더 쉬웠는데 그곳을 그만두고 나니 나는 '그냥 나'였다. 내 앞에 붙는 회사 이름 OOO은 이제 나에게 없었다. 물론 면접을 볼 때는 그 회사에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좀 더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었지만 만약 내가 프리랜서를 하거나 혼자 일을 하게 되는 상황이라면 어느 회사에 다녔다는 것만으로 평가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팀장님께 최근에 읽고 있는 '상상 속의 덴마크'란 책에 대해 말씀드렸다. 덴마크뿐만 아니라 특히 북유럽 쪽이 그런 거 같기는 한데 7,8시쯤 빨리 출근을 하고 점심시간을 아끼기 위해 자리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오후 3,4시에는 퇴근을 한단다. 그리고 집에 가족들이 다 모여서 같이 요리를 해서 저녁을 먹고 휘게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휘게hygge란, 우리나라의 정情처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운 단어라는데 일단 사전적 의미는 '덴마크에서 유래한 안락하고 편안한 분위기나 상태'란 뜻이라고 한다. 가족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거나 업무 중 동료와 함께 잠시 일을 멈추고 커피를 마시면서 일상과 감정을 공유하는 일이라고나 할까. 덴마크 사람들은 일찍 퇴근해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바쁜 중에도 시간을 내서 휘게를 선택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 것은 일찍 퇴근을 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하루라는 물리적인 시간은 24시간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 안에서 시간을 활용하려면 절대적으로 하루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일하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한 하루 8시간이라는 노동 시간을 지키고 출퇴근 시간을 1시간씩 버리고 나면 나에게 남는 게 별로 없다. 이건 애초에 한 사회의 생각과 리듬 자체가 달라서 생기는 일인데 덴마크와 같은걸 바라는 내가 너무 욕심일 수도 있다. 한 30년쯤 뒤에는 한국 사회도 바뀔지 모르겠지만 이미 그때쯤 되면 나는 이미 사회생활의 중심축이 아니다.
팀장님이 나보고 내가 하는 말들이 너무 특이하다고 생각해서, 미안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라고. 팀장님께선 나의 생각에 대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도 그것이 중요한 포인트임을 알기에 스스로도 노력해보려 한다고 하셨다. 유튜브에서 본 어느 사람의 말이 떠오른다. 5년 뒤에도 나에게 남아있을 것들, 중요할 것들에 시간을 써야 한다고. 그러니까 평생 곁에 남을 가족에게 잘하고, 죽을 때까지 가져갈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자기 계발을 하는 등의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내가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는 위치가 되어야 한다. 내 시간 위에 내가 군림해야 한다. 그런 조직에 들어가는 것도 꽤 좋은 선택이지만 일단 그런 조직이 잘 없다. 그래서 일반적인 선택은 결국 내가 엄청난 실력자가 되거나 권력이나 능력이 있어 적은 시간을 투자하고도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려운 말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아무나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나는 피터 드러커의 정신이 뿌리내린 사회에서 휘게를 외치고 있는 외로운 한 마리 짐승일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계속 생각하고 무언가를 시도한다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