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잎들이 휘날리고, 가을들녘을 떠올리다 (4)

90년대에서 다시 2002년으로 이동

by 세니seny

기차가 지나가는 곳마다 온통 금빛 물결이었다. 다시 두 번째 기억의 시점인, 고등학생으로 돌아온다.


나는 우리 학교 운동장에 있는 그 나무를 보고 이 기억을 떠올린 것이었다. 그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양이 마치 금빛 물결이 출렁이는 듯 느낀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흥분하는 내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런 날 보고, ‘뭘 알았다고 저리 흥분할까?’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내가 왜 흥분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그 나무를 보면서 기차를 타고 외할머니 댁에 갈 때의 설레는 마음이 떠올랐기 때문이 아닐까. 친척들과 빨리 만나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음식도 같이 만들고(잘 만들진 못했지만) 같이 놀고 싶은 느낌을 기억해 낸 걸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때까지는 그래도 외할머니 댁을 방문했었다. 어렸을 때는 나와 내 동생이 먼저 가자고 가자고 엄마 아빠를 졸라댔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안 가기로 한 일정을 우리 때문에 바꿔서 간 적도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보니 그런데 가기가 귀찮아지고 그러다 보니 기차를 탈 기회도 더더욱 없어지고 그런 설렘을 맛볼 시간도 거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린 너무 바쁘게 살고 있다. 정말로. 빨리빨리 하지 않으면 조금만 뒤쳐져도 한없이 세상에 뒤쳐져버리는 이 시대에 나는 정말 그날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나무를 보면서 떠올렸던 기억과, 나의 순수함을. 어린 시절을.

그날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데 거리에는 유난히 많은 은행나무들이 노란 손수건을 떨어뜨려내고 있는 중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지저분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난 좋았다. 그대로 집에 들어왔는데 아직 동생도 집에 돌아와 있지 않았다. 친구에게 부치려고 미리 써 놓은 편지를 부치기 위해 편지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편지라는 것도 요즘엔 거의 쓰지 않은 것 같다. 나도 이 편지를 받을 땐 기분이 묘하고 좋은데 정작 내가 쓰기엔 많이 귀찮아하는 것 같다. 이메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메일은 편지를 부치러 나가는 번거로움도 없고 여러 면에서 편하지만 받을 때의 설렘이 없다는 점에서 조금 실망스럽다.

어쨌든 정성스럽게 쓴 편지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우체통은 우리 아파트 가까이에 있기에 보통우편 쪽에 쏙- 집어넣고 우체통을 돌아섰다. 돌아서서 집 쪽으로 오는 길에 보니 우리 아파트 쪽에도 꽤나 많은 은행잎들이 떨어져 있었다. 대부분 초록색이 많이 있었지만 갑자기 줍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나도 은행잎을 몇 개 주워 책 속에 끼워놓았다가 나중에 몇몇 친한 친구들에게 코팅을 하고 그 안에다가 ‘2002, 가을, From. xx(내 이름)’ 이렇게 써서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 근처에서 은행잎을 주으러 나갔다. 하지만 아직 색깔이 노랗게 물들지 않은 것이 많아 두 개만 주워왔다.


실은 거리에서 은행잎을 줍다가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느라 힘들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멀쩡하게 생긴 애가 저기서 웬 나뭇잎을 주워서는 실실 대는 거지?’라고 보일 가능성이 거의 100% 였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와서는 당장 책 속에 끼워놓았다.

그날은 그 나무, 우리 학교 운동장에 있던 나무로 인해 가을을 제대로 느꼈다고 할 수 있는 날이었다. 지금까지의 내 생애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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