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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Jul 10. 2021

아빠가 보이스피싱을 당했다

뉴스에 나오던 일이 우리 가족에게 벌어질 줄이야...

     나와 아빠는 데면데면한 사이다. 내가 애교 있는 딸도 아니고, 아빠도 나에게 살가운 편은 아니다. 대신 아빠는 내가 챙기지 못한 사이 꽉 차 버린 내 방 휴지통을 제때 비워주거나 무언가가 먹고 싶다고 할 때 소파에 앉아있다가도 바로 일어나서 사러 나가는 것으로 나를 비롯한 자식들에 대한 애정을 표시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와 평소에 아빠는 전화를 자주 하지도 않고 집에서 대화가 많은 편도 아니다. 아빠는 말이 없는 편인데 그나마 술을 먹으면 목소리가 커지고 보통 사람들처럼 말수가 늘어난다. (그렇다고 평생 술에 취해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런데 바쁜 월요일 오후, 점심시간이 끝난 직후에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평소에 전화하는 일이 없는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는 것은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나 : "응 아빠~ 웬일이야~"
아빠 : "핸드폰은 잘 고쳤고?"
나 : "무슨 말이야?"


     나는 잘못 걸려온 전화인 줄 알고 핸드폰을 다시 봤지만 분명 아빠 번호로 걸려온 전화였다.


나 : "여보세요?"
아빠 : "핸드폰 고장 났다며? 그래서 신분증 보내라고 해서 보내줬잖아?"
나 : "뭔 소리야? 나 핸드폰 안 고장 났어~"
아빠 : "아이쿠..."


      그렇다.

     자식을 사칭해 핸드폰이 고장 났으니 무슨 앱을 깔고 신분증을 보내라고 한다는, 그 흔하다는 보이스피싱 문자에 속은 아빠가 누군지도 모를 보이스 피싱범에게 신분증 사진을 찍어 보냈단다. 참고로 아빠는 성격이 급해서 모든 행동이 급한 면이 있다.


나 : "아빠, 그거 보이스피싱이야!!! 그 사람들한테 신분증 보내면 그걸로 핸드폰 만들어서 비대면 계좌 개설해서 마이너스 대출받거나 대포통장으로 쓰고 사기 치는 거라고!!"
아빠 : "아이고... 너한테 전화를 하고 보낸다는 게... 다 보내고 나서 이제야 전화를 했네...."


     안 그래도 엄마도 며칠 전 그런 문자를 받았다고 나한테 얘기했었다. 그런데 엄마는 그런 게 보이스피싱이라고 인터넷에서 봤다며 답도 안 하고 바로 삭제했다고 했다. 그때는 그냥 웃고 넘겼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빠는 사회생활을 30년 넘게 했다. 심지어 은행을 다니셨다. 그런데 3년 전부터는 정말 아무 일도 안 하고 집에서 문자 그대로 '놀았다'. 30년간 일했으니 이제는 좀 쉬고 싶다고 하셨다. 늦잠을 자고,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거나 산책을 하고 오신다. 가족들이 다 나가고 집에 혼자 있다 보니 아침, 점심을 부실하게 먹는다. 그러니 엄마가 차려주는 저녁만 기다렸다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저녁을 먹으며 반주를 한다. 그리고도 저녁 내내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술을 마신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사회생활을 30년 이상 했다고 해도 사회와 교류도 거의 없고 이상하게 고집만 세진 거 같다. 평상시에 대화를 많이 했더라면 이런 이야기가 한 번쯤 나왔을 거고 그러면 당하지 않았을 텐데.


     나도 좀 알아봐야겠다 싶어서 얼른 전화를 끊고 인터넷을 검색해봤다. 도용당한 신분증을 사용할 수 있으니 당장 분실신고부터 하고 재발급 신청을 하라고 했다. 그러면 분실 신고한 신분증은 사용이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이 엄마는 통신사에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 통신사 대리점에 가서 핸드폰 신규가입을 못하게 신청하라고 했단다. 그러면 그 시점 이후로 본인 명의로 핸드폰 신규 개설이 안 되고 나중에 신규로 가입하려면 그때 본인이 해지하면 된다고 했다. 아빠는 최근에야 소일거리를 시작해서 일하는 중이었는데, 오후에 일하다 말고 근처 주민센터에도 가고 은행에도 가서 금융사기 신고 접수를 했다고 했다. 


     아빠도 놀랐겠지만 나도 꽤 놀라서 오후 내내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간간히 엄마와 통화를 하며 상황을 살폈다. 그나마 평일이라 휴대폰 대리점도 열려있고 주민센터도 운영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일이 더 커졌을지도 모른다. 만약 아빠가 평소처럼 별일 아니겠거니 하고 내가 집에 왔을 때까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내가 퇴근해서 집에 왔을 때 그제야 말했다면? 저녁엔 공공기관이 문을 다 닫으니 후속 조치를 취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아빠한테 핸드폰을 보여달라고 했다. 아빠는 풀 죽은 강아지처럼 기가 죽은 채로 나에게 핸드폰을 건네준다. 사기꾼이 문자를 보냈던 핸드폰 번호를 임시 OOO(내 이름)으로 친절하게 저장까지 해놓고 한참이나 대화를 한 흔적이 있었다. 말투만 봐도 내가 아닌데 아빠는 몰랐나 보다. 나는 맞춤법을 잘 지키는 편인데 이 사기꾼새끼는 온갖 틀린 맞춤법으로 문자를 보내 놨다. 나는 신분증만 찍어 보냈다고 해서 그나마 안심했는데 알고 보니 그 사기꾼새끼가 문자로 보낸 링크도 눌러서 뭔가를 설치한 모양이었다. 경찰서에 갔더니 경찰관이 지워줬다고 했지만 이미 깔린 걸 지워봤자 무슨 소용일까.


     아빠도 놀랐고 속은 사실에 분했을 거고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을 거다. 엄마는 판사인가 검사도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는 기사를 말해주면서 속으려면 어떻게든 안 속겠냐고, 속이려고 작정한 사람을 당해낼 수는 없다고 하며 아빠를 위로했다. 아빠한테 전화가 왔을 때 먼저 놀랐냐고, 괜찮다고 말해줬어야 했는데 나는 어이가 없어 화부터 냈고 나중에서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부모님 : 나 = 보호자 : 보호받는 자 -> 부모님 : 나 = 보호받는 자 : 보호자



     이제 부모님과 나의 관계가 서서히 역전되는 것 같다. 나는 지금도 부모님의 영향력 아래에 있지만 점점 내가 부모님을 돌보게 되고 부모님께 새로운 것들을 알려주고 종국에는 보호자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사회에 대한 것들 아니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부모님이 알려주셨고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구해주시고 위로해주셨다. 이제는 내가 슬슬 그런 역할을 해야 되는 때가 온 것이다. 다행히 바로 조치를 해서 보이스 피싱범이 은행 계좌를 개설했다거나 휴대폰을 개통하지는 않아 금전적인 피해는 없었다.  


     앞으로 이런 일들이 얼마든지 다른 형태로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이 어릴 때의 나에게 그렇게 해주셨던 것처럼, 이런 일이 생긴다면 놀라지 않았는지 먼저 묻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다짐했다. 부모님이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을 이용해 교묘하게 사기를 치다니 진짜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 문제라면 어떻게든 해결하고자 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용해 이성적인 판단을 할 여지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제는 휴대폰으로 오는 가족의(을 사칭한) 연락도 조심해야 한다니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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