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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Jun 26. 2021

25년 만의 이사 (3)

장소의 변화가 주는 관계와 생각의 변화

'25년 만의 이사 (2)'(https://brunch.co.kr/@lifewanderer/92)에서 이어집니다.



     장소가 바뀌는 것만으로도 관계의 변화가 생긴다는 점에 놀랐다. 나와 동생은 10년 전쯤 크게 싸운 이후로 서로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고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같은 집에서 살면서 속 얘기도 터놓고 하지 않았고 딱 필요한 말 정도만 했다. 그런데 이사를 하고 나서 동생과 대화하는 시간이 늘었고 은근하게 사이가 가까워졌다. 이사 온 뒤에 자연스레 이것저것을-옛 동네에 관한 것이나 새 동네에 대한 정보-말하다가 아주 조금이나마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었다. 


     전에 살던 곳에 있던 동생의 방은 뒷 베란다와 붙어 있었고 거기에 창문이 있었다. 그래서 뒷 베란다에 놓인 세탁기를 사용할 때면 소음이 났고 뒷 베란다를 왔다 갔다 하는 가족들 때문에 동생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았으며 햇빛 또한 잘 들지 않았다. 그리고 방에 있는 가구도 오래된 것들이었다. 게다가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동생의 특성상 학창 시절의 물건들, 옷 등이 방과 벽장에 엄청나게 쌓여있었다. 


     지금 동생의 새 방은 빛도 잘 들어오고 베란다와도 붙어있지 않아 프라이버시가 보장된다. 그리고 이사 오면서 어두컴컴한 방에 잔뜩 쌓여있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수많은 짐과 옷과 각종 학창 시절의 물건을 과감하게 버렸다. 동생은 코로나 발생 전에 미국에 일하러 갔었는데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한국에 다시 들어왔고 2주간의 자가격리가 끝나자마자 바로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고 3개월여를 한국에서 시간을 보내다 다시 미국으로 출국했다. 다행히 지난번 직장보다는 괜찮은 곳에 취업해 능력도 인정받고 정식 취업비자를 받기 위한 서류 접수도 진행하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다시 한국에 들어왔을 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는데 오히려 상황이 더 잘 풀렸다. 


     만약 이사를 오지 않았다면? 어두컴컴하고 오래된 물건이 가득한 방에서 다시 살아나갈, 낯선 땅으로 다시 한번 갈 힘을 얻을 수 있었을까? 될놈될이라지만, 아마도 그런 용기를 다시 얻기 힘들었을 것 같고 그래서 공간이 주는 힘이 꽤 크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주말에 이사를 하고 월요일에 처음으로 출근을 했다. 집이 바뀌니 꼭 새로운 직장에 취업해서 첫날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마음이 드는 출근길이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낯선 길이다 보니 긴장되었다. 


     새 집에 오는 방법은 버스-버스, 지하철-버스, 버스-지하철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중에 나는 모든 교통수단을 다 갈아탄 뒤 제일 마지막 수단인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중이었다. 이게 마지막 탈 것이었고 내가 내릴 곳에서 제대로 내리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초행길이니까 혹시나 내릴 곳을 지나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약간 긴장된 상태로 계속 창 밖을 내다보면서 버스에서 나오는 안내방송을 유심히 듣고 있었다.


     버스는 큰 대로변에서 우회전해서 조금 작은 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마치 클램프의 만화 'XXX홀릭'에나 나올법한 신비로운 풍경과 마주했다. 나는 방금 전까지 서울 시내의 꽤 복잡하고 차량 통행이 많은 큰 대로변을 지나왔고 그 길에서 고작 우회전을 한 번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버스가 지나가는 이 길 양쪽에 연등이 주르륵 매달려 있었다. 버스는 천천히 달렸고 나는 가로수에 매달린 연등을 눈으로 좇았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다 의문이 풀렸다. 곧 부처님 오신 날이 있었고 연등은 근처에 있는 절에서 달아놓은 것이었다. 나는 불자는 아니지만 국내 여행할 때 절에도 자주 가기 때문에 절에서 연등을 많이 봤었다. 하지만 콘크리트 빌딩이 넘쳐나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갑자기 연등을 마주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아직까지는 이 동네가 우리 동네, 우리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예전 집과 동네를 떠올리며 허전해진 마음으로 집에 가고 있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어두워진 이 길에 주렁주렁 매달린 연등이 따스한 불빛으로 낯선 동네에 이사 온 나를 맞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날부터는 긴장을 풀고 기분 좋게 집에 올 수 있었다.


     그러다 엉뚱한 생각을 했다. 여행을 하듯이 동네를 옮겨 다니며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다 어느 한 동네가 매우 마음에 든다면 정착하는 거다. 익숙함은 시간을 단축해주고 편리하고 무언가를 시도했을 때 실패할 위험도 낮다. 낯섦은 뭘 하든 시간이 더 들고 불편할 수도 있고 실패할 위험도 높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엔 그것을 맛 보고자 하는 용기도 있다. 그렇게 해서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동안 몰랐던 것들과 처음 경험해보는 새로움과 만날 수 있다. 그런 것은 해보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것이니까. 자, 이제 다음번엔 어디서 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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