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온 연락의 결말은? 피상적인 관계의 종말
'오랜만에 연락이 온다는 것은 (상)'에서 이어집니다.
우리 아빠는 평생 은행에 다니다 퇴직을 하셨다. 아빠는 젊었고 나는 어렸던 시절, 아빠는 회사에서 주어진 실적을 채워야 해서 가족 이름으로 보험을 들었다 해지했다를 반복했다. 우리 가족만으로는 안 되니까 친척들이나 부모님 친구들에게도 보험 가입을 부탁하기도 한 역사가 있어 금융계에 종사하는 임직원들의 실적에 대한 부담감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일찍이 내 성격상 금융권에서는 절대 일하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이미 어렸을 때부터 내 명의로 이런저런 상품이 가입되어 있었고 자라면서 크게 어디가 아프거나 사고를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20대가 훌쩍 지나서도 실비보험을 들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첫 번째 회사를 퇴사하면서 라식 수술을 받기로 결심하고 간 안과에서 수술 전 검사를 받다 녹내장이 발견되었다. 아빠의 실적을 채우기 위해 가입했던 공제 상품은 일반 실비보험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어서 별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제야 실비 보험 가입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녹내장 진단을 받은 이상 평범한 사람들처럼 보험을 손쉽게 가입할 수 없었다. 보험 가입이 아예 거절되는 업체도 있다고 들었고, 가입이 되긴 되는데 질병을 제외한 상해 쪽은 아예 보장이 안 된다고 했다. 그나마 그거라도 어디냐 싶어 뒤늦게 실비보험을 가입하며 이미 씁쓸함을 충분히 맛본 뒤였다. 이런 일을 겪은 내 앞에서 그런 상투적인 멘트로 보험 가입을 유도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병을 알게 되고 나서 감정에 휩쓸려 친구 한 명에게 우연찮게 병에 대해 털어놓은 적이 있는데, 곧 후회했다. 그래서 가족(과 보험회사) 이외에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선배에게 그 사실을 말하면서까지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실비보험도 있고 자동차보험도 이미 가족과 함께 가입했으며 최근에 운전자보험을 가입했다는 소식까지 듣자 선배는 많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이제는 부모님께서도 보험을 들었는지를 묻길래 다 가입되어 있다고 했다. 그다음엔 내가 해외여행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는 무슨 외화 보험 상품을 권한다. 내가 돈이 넘쳐난다면 이 상품, 저 상품 다 가입하겠지만 나는 월급이 한정된 월급쟁이이고 보험은 부담 가지 않는 수준의 금액에서 보장의 역할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즉, 나는 보험을 재테크 수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식사 자리가 끝나고 선배와 사무실 앞까지 왔는데, 인사를 하고 건물로 들어가려는 나에게 주머니에서 뭘 꺼내서 준다. 스타벅스 기프트카드다. 난 사실 이 선배를 통해 보험 가입할 생각이 전혀 없고 앞으로도 보험에 가입할 일이 거의 없다. 이 분을 통해 보험을 들자면 내 병력을 이 사람한테 밝혀야 되는데 그러고 싶지도 않고 또 자동차보험과 운전자보험은 이미 다이렉트 보험을 통해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가입되어 있어 크게 불만이 없다.
공짜로 생긴 스타벅스 카드니까 쓱 받으려다가 마음이 내키지 않아 카드를 돌려드렸다. 이 스타벅스 카드는 나보다 좀 더 보험을 가입할 생각이 있는 사람에게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저는 지금은 가입할 생각이 전혀 없지만 주위에 누가 가입하겠다고 하는 사람 있으면 꼭 소개해 드릴 수 있다고, 선배가 누굴 속여먹고 그럴 사람이 아닌 건 아니까 이거 안 주셔도 소개는 시켜 드리겠다고, 그러니 안 받겠다고 했다. 선배는 놀란 듯했지만 결국 카드를 거둬갔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했나 싶었는데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 살면서 아는 사람 중에 보험 영업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사람이 있을까? 찾아보면 주위에 알음알음 한, 두 명 정도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가 넓지 않은 나한테 아는 보험설계사 있음 소개해 달라고 하는 일은 드물 테니까 아마도 내가 누굴 소개해줄 일도 거의 없을 것이다. 훗날 내가 마음이 바뀌어 생명보험에 가입하거나 한다면 하면 또 모를까. 그러고 나니 그 선배한테서는 가끔 전체 문자가 오는 걸 제외하고는 연락이 끊겼다. 괜히 만나서 불편하게 밥 먹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편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선배가 단체문자 하나를 보냈다. 내용이 길어서 한참을 읽었는데 중요한 내용만 간추려서 써본다.
OO생명 XXX입니다.
오늘은 제 안부를 전하고자 메시지를 드렸습니다.
지난주 가족 중 한 분이 ABC(병명) 판정을 받아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중략)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께서 도움을 주셔서 빠르게 진료받고 바로 입원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경솔하고 가볍게 말씀을 드렸는지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을 다하는 XXX이 되겠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선배가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선배가 그런 상투적인 멘트를 꺼내지 않고 차라리 나에게 나와 잘 맞을 것 같은 남자 친구를 소개해줘서 잘 되게 해 줬더라면 미안한 마음에라도 보험을 들어주었을 것 같다. 아니면 자기가 회계 업무를 십 년 넘게 하다가 이직하게 된 그 간의 심경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면 혹은 같은 업무를 했던 선배로서 장기적으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조언해 줬더라면 나는 마음이 동했을 것이고 나에게 필요가 없을지라도, 조언해준 보답으로라도 보험 상품 가입을 고려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건강하다고 생각하지만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나처럼 병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고 나처럼 이미 병을 가지고 있지만 굳이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한 때 나를 짜증 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 진짜 저 사람 때문에 암 걸릴 것 같아’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곤 했었다. 그런 말을 한참 지껄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길거리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친구와 통화하거나 지나가며 무심결에 이런 말을 했을 때 바로 옆에 암환자나 그들의 가족이 우연히 지나가다 그걸 듣는다면? 내가 선배 앞에서 느꼈던 그런 기분이 들지는 않을까? 상처를 받지 않을까? 그래서 그 뒤로 그런 표현을 쓰지 않게 되었다.
나에게 녹내장이 있다고 해서 아침에 일어나 잠들 때까지, 깨어 있는 동안 내내 언젠가는 실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시간엔 그러한 사실을 잊고 있다. 하지만 6개월마다 병원에 진료를 보러 갈 때, 컴퓨터 모니터를 너무 오래 봐서 눈이 뻐근할 때, 안약의 부작용으로 눈썹이 길어져 가뜩이나 눈이 불편한데 직장 동료가 혹시 무료로 눈썹 연장 시술받을 생각 없어요?라고 물어올 때(내가 쓰는 안약의 부작용은 눈썹이 길어지는 것인데 이게 너무 자주 길어지는 통에 매번 자르느라 애를 먹는다), 아는 사람에게서 보험 가입을 권유받을 때 나에게 병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앞으로 획기적인 기술이 개발되거나 신약이 개발되지 않는 한 이것을 평생 안고 가야 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초기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마음이 많이 흔들렸는데 이제는 진단 받은지도 꽤 오래 되어서 그런지, 당장 통증이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일단 상처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무감각해져서 그런지 크게 놀라지 않는다. 그래도 두려움이 몰려올 때엔 크게 숨을 한번 쉬고,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면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만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