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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Jun 06. 2021

병원에 가는 길, 비가 내렸고 나는 우산이 없었다

낯선 이가 내어준 우산 한 켠이라는 호의

     오늘은 6개월 만에 병원 가는 날이다. 병원에 가는 날은 항상 마음이 무거운데 내 6개월간의 지난 생활을 그리고 앞으로의 인생을 판정받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어제부터 날이 흐리고 비가 오더니 오늘도 여전히 날이 흐려서 기분까지 무겁다. 


    게다가 날도 흐린데 비가 오는지는 알 수가 없어 우산을 챙겨야 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창 밖을 내다봤지만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지나다니질 않는다. 내가 가지고 다니는 우산은 매우 가볍고 작은 3단 우산이라 가방에 쏙 들어가지만 오늘은 이것저것 짐이 많아질 예정인 데다 일기예보를 보니 오전만 비가 잠깐 오다 그친다고 되어 있어서 비가 와도 그치겠지 하는 마음으로 우산을 두고 나왔다.

 




     그런데 아파트 현관 밖으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나오니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진다. 다시 올라갈까? 하지만 일기예보엔 오전만 비가 오고 그친다 했으니 그냥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집 앞에서 버스를 한 번만 타면 병원에 도착한다. 새로 이사 온 동네는, 서울에 살면서 가끔 지나다니는 곳이긴 했지만 나의 동네가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나에게 남산타워는 시간을 내서 와야 하는 곳이었는데 이제는 퇴근길에 항상 남산타워를 볼 수 있다.  


      버스를 타고 가고 있는데 빗방울이 점점 거세진다. 내가 다니는 병원은 중앙차로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길만 건너면 나올 정도로 가까워서 내려서 바로 길만 건너면 된다. 본격적인 출근시간은 아니어서인지 생각보다 길은 막히지 않았고 버스는 서울 시내 중심부를 지나 내가 내릴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니까 비가 생각보다 더 많이 온다. 괜찮아. 신호등만 바로 바뀌면 냅다 뛰면 돼. 그런데... 신호등이 안 바뀌네? 안 되겠다. 입고 있던 청자켓이라도 벗어서 머리에 뒤집어쓰기로 한다. 그럼 좀 낫겠지? 평소에 우산을 워낙 잘 가지고 다니는 편이라 이렇게 비 오는 날 우산이 없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주섬주섬 청자켓을 벗어 머리 위에 쓰는 날 옆에서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런데 아까 같은 버스에서 내린듯한 중년 여성분이 '우산 씌워줄게요'하며 자신의 우산 한 켠을 나에게 내어주신다. 난 신호등만 바뀌면 바로 뛰어갈 거라 좀 부담스러웠다.


    말로는 ‘괜찮아요’라고 했지만 신호등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고 빗줄기는 여전히 거셌다. 괜찮다는 나의 말에도 그분은 우산을 거두지 않았고 나 또한 우산 아래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신호등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한참을 기다렸다. 그분께서 먼저 말을 거셨다.


"어디로 가세요?"
"아, 전 요 앞에 병원이요."
"저도 거기로 가는데."


     이 횡단보도의 건너편에는 대학교 캠퍼스와 큰 대학병원 밖에 없다. 그러니 뭐가 되었건 아마 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 둘 중의 한 군데로 향할 확률이 높은데 목적지가 같았다. 드디어 신호등이 바뀌고 길을 건너는데 그분이 다시 묻는다.


“나는 병원 직원인데 학생이에요?”
“아, 저는 환자예요.”
“무슨 과로 가요?”
“안과요.”


     학생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마지막으로 다닌 학교를 졸업한 지 10년이나 지났다. 나는 병원을 방문한 환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이 병원이 거래하는 수많은 거래처 중에 한 군데에서 일하는 직원이기도 했다. 오늘은 휴가를 내고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온 것이었다. 우리 회사의 거래처라곤 해도 영업사원이 아니니까 직원으로서 이곳에 방문할 일은 없겠지만 나는 사무실에서 우리 회사의 매출을 처리하기 위해 이 병원에 세금계산서를 발행하고 있다.


     버스정류장이 중앙차로에 있었기 때문에 횡단보도가 짧았다. 횡단보도를 건너 얼마 가지 않으면 병원 본관 입구로 들어선다. 나는 바로 앞에 보이는 본관 건물로 들어가면 안과가 있는 건물과 연결되기 때문에 이제 저 건물로만 들어가면 되었다. 그런데 그분은 출근길이니까 본인이 출근하는 건물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본인이 근무하는 건물 쪽에서도 안과가 있는 건물까지 연결이 되긴 하는데 좀 멀다고 하시면서 길을 알려주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생각보다 꽤 많이 돌아서 와야 할 거 같았다. 전에 병원을 한 번 돌아본 적이 있었는데 여러 건물이 연결되어 있어서 꽤 복잡했었다. 모르는 사람과 괜히 어색하기도 하고 또 처음 가보는 건물에서 가장 반대쪽에 있는 안과 건물까지 오려면 시간도 꽤나 걸릴 듯싶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얼마 멀지 않으니 여기 앞에 바로 보이는 본관 건물로 그냥 들어가겠다고 했다.


     예진 시간보다는 일찍 왔지만 진찰시간 전에도 검사할게 많고 시간이 지날수록 환자가 점점 늘어나기 때문에 무조건 일찍 가서 검사를 받는 게 좋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산을 씌워준 그분께 고맙다고 인사드리고 우산을 빠져나왔고 다시 청자켓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가까운 건물 입구로 들어갔다.


     안과 건물로 들어와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 전 여러 가지 검사를 한다. 이 건물은 비교적 최근에 리모델링을 한 데다 6개월 만에 한 번씩 오니까 아직 낯설다.


     제일 먼저 시력을 재는 검사실 앞으로 가서 대기표를 뽑고 기다린다. 곧 내 번호가 불리고 이름을 확인한다. 그런데 새로 생긴 시력 검사실은 꼭 아케이드 게임의 한 장면 같다. 회색 벽으로 이루어진 그 검사실은 한 명씩 시력을 잴 수 있도록 여러 칸으로 나뉘어 있다. 각 방(칸)에는 똑같은 시력검사표가 붙어 있고, 똑같은 책상이, 똑같이 종이로 된 눈가리개가 있다.


     대기표 번호가 불린 환자들은 이름을 확인한 후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긴장하며 서있다. 코로나 때문인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있다 보니 더 게임 같다. 칸마다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 선생님들이 기계처럼 한 명씩 나와서 똑같은 행동과 똑같은 대사를 한다.


     검사실에서 한 명이 나오면 제일 앞에 있던 사람이 호명되어 작은 방으로 쏙, 하고들어가며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나도 왠지 팔다리를 90도 직각으로 움직이며 게임 캐릭터처럼 걸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ㅇㅇㅇ님, 들어오세요”
“가리개로 왼쪽 눈 가리고 앞에 보이는 거 읽어보세요”
“반대쪽 가리시고요”
“끝나셨고요 나가서 대기하고 계세요”
"다음 XXX님, 들어오세요"
(이하 반복)


     병원에 가는 것 자체가 어딘가가 아프기 때문에 가는 것이라 기분이 좋을 리가 없는 데다 은연중에 병원 직원들의 기계적인 태도에 상처를 받을 때도 있다. 그런데 오늘은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그렇게 무겁지 않았던 건 같은 버스에서 내렸고 옆에 서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우산 한 켠을 내 준 그 직원분 때문이었다.


     우산이 없을 때 남의 우산에 뛰어들 뻔뻔함까지는 없지만 앞으로 누군가 우산을 씌워준다고 하면 그냥 고맙게 받아야겠다. 처음에 우산 씌워주셨을 때 바로 '고맙습니다'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계속 '괜찮아요~ 아니에요~' 그래서 그분도 민망했을 것 같다.


     대학병원에 정기적으로 다닌 지 올해로 9년 차다. 여전히 병원에 가는 날은 여전히 긴장되고 걱정되는데 꼭 재판정에 선고를 받으러 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지난번 검사 이후 오늘까지의 6개월 동안 내 눈 안에서는 사소하든 주목할 만 하든 하여간 어떠한 변화가 계속 벌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보이거나 느껴지진 않으니까 전혀 모르고 있다가 검사를 받고 그제야 벌어진 상황을 알게 된다면? 유의미한 변화가 없었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면- 난 그걸 하나도 모른 채 6개월 간 희희낙락하며 시간을 보냈거나 오히려 컨디션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했을 거라는 죄책감과 결국은 내가 나를 파괴하고 있던 게 아니었나라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될까 봐 항상 긴장하게 된다.


     아마 그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의 대부분은 그 병원과 병원의 수많은 협력업체에서 일하고 있거나 옆에 있는 대학교의 학생이거나 나 같은 환자들일 것이다. 우산을 가져가지 않은 덕분에 비는 조금 맞았고 그날 하루 종일 비가 애매하게 내리는 바람에 우산이 없어서 계속 곤란했지만 그래도 우산을 가져가지 않은 덕분에 낯선 이의 우산 한켠을 얻어 비를 피할 수 있었고 그 기억으로하루를 기분 좋게 보낼 수 있었다.


    이런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병원이나 그 단체의 이미지가 결정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친절직원 추천이라도 해 드리게 성함이라도 여쭤볼걸 그랬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친절하신 직원분께, 다시 한번 정말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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