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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Jun 12. 2021

25년 만의 이사 (1)

'우리 집'에서 25년을 살았다

     금요일 퇴근은 일주일치의 피곤이 몰려와서 매우 피곤한 상태지만 주말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억지로 신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보통은 버스에 타면 유튜브를 보거나 인터넷 검색을 하거나 전자책을 읽는 등 창문 밖을 잘 쳐다보지 않는데 오늘은 많이 피곤해서 그런지 그런 것들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귀에 꽂아놓은 에어팟의 음량을 크게 하고 멍하니 버스 창밖을 바라보며 집으로 오고 있었다. 내가 탄 버스는 큰 대로변에서 우회전을 한 후 신호 때문에 잠시 멈춰 섰다. 어라, 그런데 이 퇴근길의 풍경이 언제 이렇게 익숙해졌지?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의 명의로 된 '우리 집'이 없었던 우리 가족은 계속 이사를 다녔다. 전세 만기가 2년이니까 최소 2년 혹은 한 번 정도 전세 계약이 연장되면 4년째에는 어김없이 이사를 했다. 그렇게 여러 번의 이사와 초등학교 3학년까지 두 번의 전학을 거쳐 내가 열 살 때, 드디어 '우리 집'이 생겼다. 


     '우리 집'은 여태까지 살던 곳 중에 제일 넓었고 가장 높은 층에 위치했다. 우리 가족은 그전까지 1층 아니면 2층 즉 저층에만 살았었고 내 방이 있었던 적도 있었지만 매우 작았고 화장실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진짜 '우리 집'에는 화장실도 두 개나 있는 데다 동생이랑 거실 끝에서 부엌 끝까지 걸어도, 다리를 넓게 벌려서 하나, 둘, 셋, 넷... 걸음을 세면서 걸어도 한참이 걸릴 만큼 넓었다. 그리고 '우리 집'이니까 다른 데로 이사를 다닐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그 집에서 열 살부터 서른네 살까지 25년을 살았다. 나의 거의 모든 기억과 추억들은 그 집에 살 때 있었던 것들이다. 긴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가야 할 '집'이라고 하면 당연히 그 동네를 떠올렸고, 하루 종일 일을 하고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할 '집'도 그 동네뿐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를 다녔고 직장도 그 집에서 다녔다. 


     내 방 창문 너머로 보이던 건너편 아파트 단지에는 벚꽃나무가 길 하나를 두고 양 옆으로 심어져 있었다. 4월 초,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면 벚꽃나무가 양 옆으로 펼쳐져 있어서 장관이었다. 퇴근길에 괜히 한 정거장 먼저 내려서 남의 아파트 단지에 펼쳐진 벚꽃길을 혼자 슬슬 걸어오며 밤 벚꽃을 보곤 했었다. 그리고 중학교 때엔 벚꽃나무 아래를 지나 친구들과 집에 오다가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누군가 한 명이 말하니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겠다고 손바닥을 허공에 펼치고 뛰어다니며 깔깔대던 기억이 난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 학교를 졸업하면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못 빌리는 게 꽤 속상했는데 마침 그 시기에 동네에 도서관이 생겨 좋아했던 기억도 난다. 도서관 사용자 아이디는 회원가입을 한 연도와 날짜로 시작되는데 특이하게도 그날이 12월 12일이어서 내 도서관 아이디는 20081212로 시작해서 외우기 쉬웠다. 여름밤, 집 앞 천변의 자전거 도로에서 분노를 실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회사일로 받은 스트레스를 털어내기도 하고, 텅 빈 운동장에서 혼자 음악을 들으며 훌쩍훌쩍 울기도 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 앞에는 떡볶이 양도 푸짐하게 주시고 학생들에게 친절했던 떡볶이 포장마차가 있었다. 그곳은 아저씨가 운영하고 계셨는데 장사가 잘 되어서 근처 아파트 상가에 가게까지 내기도 했다. 그런데 나도 나이가 들고 생활 반경이 달라지다 보니 포장마차 시절보다는 가게에 자주 들르지 못했고 대학생이 되어 가보니 어느새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떠나셨다. 또 그때는 동네마다 만화방이 있어서 시험이 끝나면 꼭 만화책을 빌려다 보기도 했다. 또 뭐가 있더라... 동네 YMCA에서 친구들하고 탁구를 치고, 시험이 끝나면 노래방으로 놀러 다니고,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니까 공중전화에서 친구네 집에 콜렉트콜로 전화를 걸어서 나오라고 하고... 그런 학창 시절의 추억들이 모두 묻어있는 동네였다.


     그곳은 말 그대로 '우리 집'이니까, 내가 외국으로 이주하거나 결혼하지 않는 이상 이사 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사라는 옵션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엄마는 전부터 동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이사를 가고 싶어 했지만 '우리 집'인 그 집을 팔아야만 어딘가로 이사를 갈 수가 있었다. 집의 매매가가 오르고 집이 팔려야 우리도 차익을 봐서 그걸 가지고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갈 수가 있었는데 다른 지역 아파트 값은 빠르게 오르는데 비해 '우리 집'의 가격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이곳이 '우리 집'이라는 이유로 계속 이 동네에 머물렀다.

     

     그런데 부동산 정책도 개편되었고 동생이 외국에 나가 일하게 되면서 당분간 집을 비우게 되었다. 엄마는 이제는 이사를 가야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현재 나랑 엄마만 일을 하고 있는데 둘 다 직장이 집 근처가 아니었다. 엄마는 결심을 하고 부동산에 집을 내놨다. 몰랐었는데 예전에도 부동산에 집을 내놓은 적이 있었지만 집이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일이 되려니까 그러는지 사람들이 하나둘 집을 보러 오기 시작했고 그중에 어떤 아저씨가 계약금을 걸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도 이사 갈 곳을 알아봐야 했다. 그런데 며칠 만에 그 아저씨가 잔금을 마련하는데 스케줄이 꼬여서 실 계약을 못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매매계약은 파기되었고 다시 다른 사람들이 집을 보러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다시 며칠이 지나지 않아 새로운 매매계약이 성사되었다. 이번엔 실제 계약까지 이어졌다. 이제 우리 가족에게 이 집과 보낼 수 있게 주어진 시간은 3개월이었다. 



'25년 만의 이사 (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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