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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Dec 02. 2023

2021년의 어버이날을 앞두고

올해 어버이날 준비는 동생과 함께 했다

(2021년 시점에서 쓰인 글입니다.)



     나에겐   터울의 여동생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어버이날이나 부모님 생신, 결혼기념일 등 특별한 날엔 항상 이벤트 준비를 좋아하는 동생과 함께 뭔가를 준비했었다. 선물을 준비하기도 하고 깜짝쇼를 기획하거나 카네이션을 드리기도 했었다.


     그러다 성인이 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항상  혼자 뭔가를 준비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어버이날엔 부모님께 선물이나 용돈을 드려야 하는데 동생은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한동안 취직을 하지 못해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초에 그런 동생을 이런 행사의 준비위원으로 넣을 수 없었다. 그에 대해 나도 말하지 않았고 동생도 나에게 묻지 않았다.


    돈도 돈이지만 우리 둘은 성인이 되고 나서 서로 말도 섞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서로를 절대 만나지 않을  같은 평행선이라고 느꼈던 시절. 그래서  집에서 지내도 서로를 모른 체하며 보내온 시간도 꽤 길었기에 둘이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것 자체가 얼토당토않은 일이기도 했다.






     올해 어버이날에도  혼자 부모님께 드릴 용돈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작년부터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 동생한테 연락이 왔다. 그동안 동생은 국내에서 취업을  적이 있었지만  회사를   다니다 그만두고  다른 곳을 다니다 그만두고를 반복했었다.


     2019년 말엔 미국에 인턴 프로그램 같은 걸 통해서 일을 하러 갔다가 4개월여 만에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이건 완벽히 그녀만의 잘못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코로나로 경영상황이 어려워졌다는 이유를 들어 고용주가 내 동생을 일방적으로 해고한 것이었으니까.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외에도 고용주는 인간성이 돼먹지 못한 사람이라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동생은 일방적인 해고라는 상처를 받고 다시 한국에 돌아왔지만 아직 비자 기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번이 아니면 다시 외국에서 일할 기회가 없겠다 싶어 아직 코로나가 창궐하고 있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새로운 회사에 면접을 보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다행히 이번엔 비교적 좋은 사장님을 만나서 본인도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되었다. 일은 힘들지만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면서 조금씩 낯선 땅에 정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본인도 스스로 자리를 잡아간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나에게 어버이날에 어떤 선물을 드릴 것인지 먼저 물어온 것이었다.


     나는 선물보다는 용돈을 드릴 거라고 했는데 그녀는 계속 선물을 뭘로 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용돈을 드리자고 주장해서 부모님 드릴 용돈을 반반 부담하기로 했다. 전에는 뭘 하든 내가 자식 두 명분을 감당해야 돼서 부담되었는데 동생하고 나눠서 한다고 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 부모님 입장에서는 자식이 둘이니까 이렇게 같이 효도를 하는 기분도 제법 괜찮았다. 아니, 사실 어렸을 때 경험해 봐서 이미 알고 있던 감정이었는데 잊고 있던 감정을 되찾은 느낌도 들었다. 학생 때 어버이날을 준비하는 것과 성인이 되고 나서 또 일을 시작하고 나서 어버이날을 맞이하는 상황은 좀 다르긴 해도.


    동생은 타지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전부 본인이 부담하고 있는 데다 내가 동생보다 일한 지 오래되어서 돈을 더 많이 벌고 있으니 부담 능력으로 따지자면 내가 더 내야 하는 게 맞다. 장녀라는 위치로 봐서도 그렇다. 하지만 그동안 나 혼자 한 게 억울해서(몇 년 치의 어버이날 용돈과 아빠 환갑기념 여행 등) 이번엔 반반씩 하기로 했다. 동생은 별다른 이견이 없었고 반반 부담하자는 것에 동의했다.


     그동안 내가 억울했던 건 이번 어버이날만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하루라도 빨리 동생이 취직해서 자리 잡기를 바랐지 동생은 지난  년간 취업준비생 역할을 하는 데만도 바빴다. 그리고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동안 나는 첫째라는 이유로 또 장녀라는 이유로 자리를  잡고 있어야 했다. 아무도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하거나 나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집안의 평화가 유지된다는 사실을. 만약 나마저 취준생 기간이 길어졌거나 회사를 그만두고 빈둥대거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장기간 공부를 했다면 집안 분위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에겐 자식  중에 한 명이라도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동생은 아마 언니가 자리를 잡고 있으니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동생은 선물이 없는 대신 편지를 쓰자고 했다. 자신이 미국에 있으니 나보고 편지지를 사서 편지를 쓰자고 했다. 나도 카드를 잘 써서 주고 편지를 쓰던 사람이었지만 최근엔 손 편지를 거의 쓰지 않게 되어 집에 편지지도 없었다. 게다가 어버이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는 그즈음 월마감에 야근을 하느라 편지지를 사고 편지를 쓰기엔 여유가 없었다.


     동생은 글을 잘 쓰는 편인 데다 업무 상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도 다룰 수 있었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편지지 이미지를 찾아서 거기에 글을 얹어서 메일로 보내면 내가 출력해서 실물 편지를 전달하기로 했다. 





     어버이날 당일엔 아침 일찍 부모님이 고향에 내려가시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어버이날 전날 저녁,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시고 있는 부모님께 드릴 게 있다고 하며 동생과 내가 준비한 용돈과 동생이 준비하고 내가 출력만 한 편지를 전달했다. 동생에게는 이 용돈 증정식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전달했다. 


     어린이날과 생일에는 꼭 선물을 받고 설날에는 세뱃돈을 받던 나와 동생. 언제까지고 받기만 하는 자식 역할을 할 줄 알았던 우리. 그동안 부모님께서 나와 동생에게 해줬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부모님의 생신을 챙기고 어버이날을 챙긴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동생이 있어서 든든했다. 우리는 보통 사이가 좋다는 자매들처럼 모든 일상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어렸을 때의 추억들과 같이 키웠던 강아지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할 수 있는, 각자에게는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언니 그리고 동생이라는 사실엔 변함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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