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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Nov 11. 2023

맥주 한 캔의 로망

정-말 맛있는 맥주를 마시고 싶다

2013년 시점, 재취업을 위해 면접을 보러 다닐 때 쓴 글입니다.




     나는 외모와 성격마저 아빠를 닮았으니 은연중에 술을 잘하는 아빠의 모습도 닮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틀렸다. 나는 술을 평범하게 마실 수 있는 축에 속했다. 하지만 아빠의 피를 타고난 것은 맞는지 술이 싫지는 않았다. 평소에 말이 없고 조용한 나지만 술을 마시면 말 수가 많아지는 것까지 아빠와 똑같았다.




     처음 마셨던 술은 실수에서 발생했다. 중학교 3학년이던 어느 더운 여름날이었으며 아마도 일요일 오후였을 것이다. 거실에 상을 놓고 가족 모두가 모여서 점심을 먹던 중이었다. 나는 물이 마시고 싶어서 무심결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컵에 담긴 투명한 물체를 보고 그대로 컵을 집어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나 우리 집은 주로 보리차를 마시기 때문에 생수같이 투명한 물을 먹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마시기 전에 깨달았어야 했다.                  


     내가 생수인 줄 착각하고 마신 그것은 물이 아니라 소주였다. 너무 썼다. 평소에 반주를 즐기는 아빠가 식사 때마다 아무렇지 않게 마시길래 ‘맛있는 건가?’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맛이 없었다. 화장실에 가서 퉤 퉤 퉤, 하고 뱉으면서 아빠는 왜 이 맛없는 걸 그렇게 맛있게 마시나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되었다. 학창 시절 내내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대학생이 된 것이다. 하지만 대학교 생활은 그다지 재미있고 매력적이진 못했다. 아무래도 그건 대학생을 배경으로 한 시트콤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방송은 방송일 뿐 현실과는 달랐다. 


     그래서 대학생이 되었다고 해도 고등학교 때의 생활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도 고등학생 때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갑자기 무지막지하게 큰 자유가 주어지면서 그것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나에게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혼자 망망대해에 떠있는 섬 같다고 느껴서 외로웠다. 그나마 5월쯤에 교내 오케스트라 동아리에 가입해 열심히 활동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학교와 학교생활에도 애착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교 3학년이 되었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그때부터 본격적인 진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3학년에 올라오기 전 이미 휴학을 한 친구들도 있었고 남자 동기들은 이미 군대에 갔거나 늦어도 2학년을 마치고는 군에 입대했다. 전문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과 어학연수를 준비하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으니 일단 학교를 다니기로 했다.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부터 동아리 활동도 그만두기로 했기 때문에 학교 다니는 낙도 없었다. 그리고 친구들이 많이 휴학하는 바람에 같이 수업 듣던 친구들도 사라졌으며 전공수업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재미가 없었다. 그렇게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나니 나에게 남은 건 지금까지 다녔던 학기 중에 제일 낮은 학점과 얼른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라는 부모님의 잔소리뿐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호타루의 빛>이라는 일본 드라마를 접하게 되었다. 나는 웃기거나 재밌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주로 버라이어티 쇼 프로나 코미디 아니면 영화도 로맨틱 코미디 같이 좀 가벼운 편인 걸 선호한다. 왜냐면 나는 평소에 진지하고 무거운 인간인지라 이런 영상물이라도 보면서 기분 환기를 시켜주지 않으면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기 때문이다. 


     밖에서는 커리어 우먼으로 열심히 일하고 집에 와서는 편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뒹굴거리는 호타루의 갭차이가 재밌었다. 그런데 하나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 호타루는 왜 항상 퇴근 후 집에 와서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를 꺼내 툇마루에 앉아 ‘캬아’하면서 맥주를 마시는 걸까? 그게 그렇게 맛있나?


     대학교에 들어오면서 여전히 소주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맥주는 조금 좋아하는 편이긴 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가끔 한 번씩, 무언가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이 있을 때는 맥주를 사 가지고 와서 방에서 홀짝홀짝 마셨다. 그러다 일주일의 일과가 끝나는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나에게 ‘일주일 동안 수고했다’는 선물로 무한도전을 보며 맥주 한 캔을 홀짝 거렸다. 또 시간이 지나고 대학교를 졸업한 뒤 신입사원 면접을 보고 와서 기분이 우울해졌을 때도 맥주 한 캔으로 마음을 달랬다.    

  

     호타루가 왜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 집에 와서 맥주 한 캔을 마시며 모든 것을 푸는지 나이가 들며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신입사원으로 취직해 회사를 다니면서부터 정기적으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금요일만 맥주 딱 한 캔을 마셨다. 그렇게 시원하고 달콤할 수가 없었다. 나는 첫 회사를 다닌 3년간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열심히 했다. 이번에 본 면접에서 기분 나빴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솔직히 내가 3년간 일을 설렁설렁했다면 면접관으로부터 들었던 말은 그냥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신경 곤두세우고 일 하나는 열심히 했다. 객관적으로 또 수치화해서 봤을 땐 같은 일을 3년간 반복했으니 득 될 게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나의 겉모습만 봤다. 나의 실제 모습은 알지 못한 채 나를 폄하했다. 내가 열심히 일한 3년을 1년의 가치로 평가절하하고 만약 내가 당신을 채용한다면 당신은 신입사원밖에 안 된다며 내가 그동안 열심히 일한 시간을 뭉개버렸다.






      다시 취업이 되면 일요일 저녁마다 무거운 마음으로 다음날 출근을 걱정하겠지. 하지만 나는 얼른 다시 취직해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열심히 일하고 금요일마다 나에게 맥주 한 캔을 사며, 일한 뒤에 먹는 정말 맛있는 맥주를 마셔보고 싶다. 


     맥주가 잘 어울리는 계절인 여름이 다가왔는데도 취직이 되지 않은 나는 맛있는 맥주를 마시지 못하고 있다. 아니, 마실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처음 취업 준비를 하던 4년 전의 그때처럼 마음 한 편이 무거운 채로 맥주를 마시고 있다. 하루빨리 호타루처럼 하루의 피로와 노력을 모두 보상받는 그런 맛있는 맥주를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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