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페달을 밟아 마주한 길 끝에서 유럽을 만나다
(2020년 시점에서 쓴 글입니다.)
내가 25년을 살았던 아파트 바로 앞에는 안양천이 있었다. 힘들거나 우울한 일이 있으면 안양천에 나가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마음을 달래곤 했었다. 그리고 다니던 중학교도 안양천변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환경 정화 활동을 하면 안양천에 나가 쓰레기를 줍는 등 나는 그 동네에 살면서 여러 가지로 안양천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25년 만에 새로 이사 온 동네에는 양재천이 있었다. 안양천변을 떠나면서 앞으로 새로 이사가게 될 곳에선 안양천처럼 자전거를 타거나 걸을 만한 공간이 더 이상 없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매우 아쉬워했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집 근처에 천변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올 수 있었다.
안양천과 달리 우리 집 옆을 흐르는 양재천은 강폭이 더 좁고 그에 맞게 인도나 도로도 좁다. 탄천 쪽으로 나가면 길이 좀 넓어지긴 하는데 우리 집은 과천 쪽에 가까워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이 좁은 길에 사람은 어찌나 많은지. 하지만 이런 공간이 가까이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니 더 이상 불평불만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거주지 근처에 지하철역, 마트 등 편의시설이 있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편의시설 말고 자기가 좋아하는 특정한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선호하는 곳은 사람마다 다를 것 같다.
예를 들어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프랜차이즈 카페 말고 친절한 주인과 로스팅이 잘 된 원두를 파는 카페가 집 근처에 있는 걸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혼술 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집 앞에서 가볍게 한 잔 하고 들어갈 수 있는 술집이 여러 군데 있는 걸 선호할 수도 있다.
내가 편의시설 외에 집 근처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장소는 다음 세 곳이다.
첫째, 도서관.
둘째, 수영장.
셋째, 공원이나 천변 같은 야외.
끊임없이 책을 빌려보는 나에게 도서관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다행히 집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서초구립양재도서관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도서관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도 되지만 걸어갈 수도 있다.
마침 이 도서관은 양재천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양재천을 따라 걸어도 된다. (안타깝게 양재도서관은 정말로 천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바람에 2022년 8월 폭우 때 물난리가 났을 때 침수되어 한동안 문을 닫았었다.) 퇴근길에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린 후에는 서서히 지고 있는 해와 함께 바람을 맞으며 기분 좋게 집으로 슬슬 걸어온다. 그럴 때 차오르는 행복감과 고양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짜릿하다.
그리고 양재천에는 오리가족이 산다. 시에서 풀어놓은 건지 자연적으로 서식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떼를 지어 물에서 헤엄쳐 다닌다. 때로는 깃털을 말리기 위해 풀밭에 올라와있기도 한다. 그럴 때면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서 사진도 찍고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집 앞에서 한강까지 합류지점의 거리는 약 10km 정도다. 그래서 집에서 한강까지 나가는 것은 꽤 큰 결심을 필요로 한다. 전에 살던 곳에선 안양천에서 한강까지 5k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편도로 그 정도면 무리하지 않고 적당하게 페달을 밟아 한강까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10km로 거리가 두 배나 늘어났기 때문에 상황이 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무리해서 한강까지 가는 대신 반대쪽인 과천 방향으로 가보기로 했다. 한강으로 가려면 강남 쪽으로 나가야 해서 사람들도, 자전거도 많아지는 느낌이었는데 과천 쪽으로 가니 길이 확실히 한가롭다. 여유로워서 좋다.
게다가 어느 일정 구간을 지나자 주위에 건물도 없고 풀숲도 우거져 있어서 꼭 시골길을 달리는 기분이었다. 이곳은 분명 행정구역 상 서울인데도 그렇다. 나는 이런 느낌이 너무 좋다. 낮에는 강남 한복판의 빌딩숲에 서 있다가도 그날 밤에는 한없이 펼쳐진 자연에 둘러싸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내가 거주지 근처에서 선호하는 장소 세 군데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천변과 같은 야외인 것이다.
처음 가는 길이라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도 모르고, 얼마만큼 갈지도 정하지 않은 채 그저 페달을 밟아 앞으로만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정면 시야에 건물 하나가 들어왔다.
왜 유럽식 건물이
내 눈앞에 보이는 거지?
어, 이거 뭐지? 내가 헛것을 봤나?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건물 앞 쪽까지 쭉 달려가서 자전거를 멈추고는 지도앱을 켰다. 그곳은 과천성당이었다.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해외여행을 못해서 아쉬웠다. 그런데 이 풍경을 보자마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마치 해외 여행지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현지에 있는 성당을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이걸로 올해 여행한 셈 치자.
아직까지 양재천과 많은 추억을 쌓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곳은 부모님이 소유한 집이 아니라 전셋집이기에 2년 뒤에는 이사를 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여기서 지내는 동안만큼은 잘 부탁할게. 너에게 나의 슬픔과 외로움을 줄 테니 나에게 미소와 벅참과 한없는 위로를 주기를.